아는것이힘이다/일제강점기

급진개화파 박영효의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GoodFortune 2019. 8. 15.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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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1939

 

박영효는 철종의 부마로 고종의 친척 매제였다. 급진 개화파로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 주도했으나 실패로 인해 20여 년을 일본 망명 생활을 했다. 1882년 일본으로 가는 배에서 고종의 명으로 제작된 이응준 태극기 중 4괘의 좌우를 바꿔 재도안 했고, 이것이 태극기의 원형이 되었다.

 

 

박영효는 1861년(철종12) 아버지 박원양의 아들로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박영효는 형 박영교와 홍문관 제학이던 박규수의 문하생이 되었다. 박규수와 유대치에게서 새 문물에 대한 정보와 개화사상을 배웠고, 개화에 대한 시대적 요구를 알게 되었다. 어윤중, 김옥균, 김윤식, 홍영식, 유길준,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등 동문수학했던 이들과 가까워졌고, 훗날 개화당을 만들었다.

 

1872년(고종9), 철종의 딸인 영혜옹주의 부마를 낙점하게 되자, 우의정이었던 박규수와 수원부 유수 신석희의 추천으로 박영효가 간택되었다. 영혜옹주는 철종과 숙의 범씨의 딸로, 철종의 5남 6녀 중 영혜옹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요절하였다. 철종의 하나뿐인 딸 영혜옹주와 혼인하게 되며 금릉위의 봉작과 상보국숭룩대부 품계를 받고 삼정승과 같은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3개월만에 옹주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부마의 재혼과 축첩이 불법이라 그는 후사를 얻을 수 없었는데, 고종이 이를 불쌍히 여겨 궁녀 몇사람이 하사되어 이들에게서 서자, 서녀를 얻었다.

 

드라마 '명성황후'의 박영효

 

1882년 훈련도감에서 해고된 구식 군인들이 13개월동안 연체된 봉급에 대해 정부가 불량쌀을 지급해서 난이 일어났다. 이를 임오군란이라 하는데 당시 흥선대원군과 척화파들이 중전과 외척 민씨를 제거하는 일로 확대시켰다. 청나라군이 개입하며 임오군란은 실패했고 흥선대원군은 텐진으로 끌려가고 척화파들은 제거됐다. 청나라와 결탁한 중진 민씨와 외척들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들이 조정의 중책을 맡았다. 난의 진압을 축하하지 위해 과거 시험이 열리며 이완용, 서재필 등이 출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임오군란의 수습으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제물포 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은 임오군란 때의 피해보상을 요구한다며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를 파견하여 제물포에 상륙했다. 조선은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고 일본 공사관에 일본 경비병을 주둔시키게 되었다. 제물포 조약에 따라 사과 사절로 박영효, 김만식 등이 수신사로, 홍영식, 서광범 등이 수행원, 군왕의 밀명을 띤 민영익, 김옥균 등 15명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으로 가는 배에서 '이응준 태극기' 중 4괘를 좌우를 바꿔 재도안하였는데, 이것이 대한민국 태극기가 됐다. (이응준 태극기는 그보다 4개월 전에 만들어진 것이었다.)그들에게 일본은 극진한 대접을 했고, 100일간의 체류 비용을 일본이 감당했다. 또한 당대의 철학자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들이 만날 수 있도록 주석하여 해박한 근대 지식으로 조선 청년들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또한 영국, 미국, 독일 등의 외교사절과도 접촉해 국제정세에 대한 지식을 넓혔다. 이렇게 일본에 간 사절단은 일본에 호의적이 되었고, 친일 성향을 갖게 된다. 이후 일본의 힘을 빌려 개화와 정치개혁을 단행하고자 한 것이 갑신정변이 된다.

 

 

 

1883년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 민씨일족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박영효는 1883년 한성부판윤으로 임명되었다. 일본에서 인력거를 들여와 조선에 보급했다. 한성부에 도로의 확장과 포장 등 도시 정비와 색깔있는 옷의 장려 등 개혁을 시도했으나 수구파의 반대에 부딪혀 중단되었다. 또한 신문국을 설치해 신식 신문의 창간을 계획하였으나 자금 문제로 실패하였고, 사헌부, 사간원, 유학자들의 탄핵을 받다가 광주부 유수로 좌천되었다.

 

박영효는 광주유수 겸 수어사를 겸하며 연병대를 신설하고 일본식 훈련을 시작했으나 비난 여론이 있자 그마저 사퇴하고 물러났다. 그해 10월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원과 자무으로 한성순보를 창간했다. 그 시기 즈음 박영효는 상궁 범씨에게서 아들 박진서와 박일서를 보았고, 둘째아들인 박일서의 딸이 의친왕의 장남과 결혼하는 박찬주이다.

 

개화당은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청사의 낙성연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개화당은 수구파 인사 몇을 제거하고 고종 부부를 납치해 경우궁에 유폐한 후 정국을 장악했다. 그러나 외척 민씨의 요청으로 청나라군이 개입하게되어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박영효의 형 박영교와 홍역식은 유폐시킨 고종내외를 지키다가 청군에 살해당했다. 그의 부친 박원양은 정변 실패를 듣고 장손주을 죽이고 자신도 자결하려 했지만 의금부에 체포되었고, 어머니는 살해당했다. 투옥된 박원양은 옥에서 아사했다고 전하며, 둘째 형인 박영호는 삭탈관직되었는데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해 몇년을 공사관 안에 있었다.

갑신정변 - 박영효,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일본공사 다케조에는 김옥균, 박영효, 이규완, 정란교, 서광범, 변수 등 9명을 피신시켜 일본으로 갔다. 이들은 일본에 들어가며 일본 총리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일본 이름을 받았다. 박영효의 일본 이름은 야마자키 에이하루이다. 이후 윤치호, 김옥균은 중국으로 갔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일본으로 갔다.

 

박영효는 메이지 학원에서 영어과에 들어가 공부를 했고, 동 서양의 서적들을 읽으며 수학했다. 1888년(고종25) 일본에서 장문의 개혁상소를 올렸는데, '개화상소'라고 불리는 것이다. 봉건적 신분제도의 철폐, 근대적 법치국가의 확립에 의한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주장했다. 이 상소문으로 주소를 알아낸 수구파들은 1892년 박영효를 암살하기 위해 이일직 등 수십여 명을 자객으로 보냈다.

 

자객을 피해 다니던 당시 일본인 도야마 미쓰루는 김옥균에게 술과 여색을 권했고, 박영효는 그를 말렸지만 김옥균은 일본여자를 만나 아들을 두었다. 김옥균의 여색을 비난하며 박영효는 그와 멀어졌다.

 

1894년(고종31) 조선에서 갑오개혁이 일어났다. 이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주도로 시작된 개혁으로 신분제 폐지, 조세의 급납 통일, 조혼 금지, 과부 재가 허용, 고문과 연좌법 폐지 등이었다. 이로 인해 갑신정변의 실패로 망명했던 개화파들이 일본의 위세를 업고 돌아오기도 했다. 갑오개혁으로 박영효는 사면되었고, 그해 조선으로 귀국해 내부대신이 되었다. 김홍집의 친일 내각에서 내부대신으로 개혁을 시도했으나 김홍집과 심한 갈등이 계속 되었다. 그후 김홍집을 실각시킨 뒤 자신이 총리대신서리가 되었다. 그뒤 약 200일 동안 2차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1895년 7월 초 박영효는 명성황후 암살 계획을 세웠다.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결탁하자 박영효는 단독으로 왕비 암살 계획을 세웠다. 명성황후 또한 1894년 여름부터 급진개화파 사살 계획을 세웠다. 박영효는 일본에 병력 요청을 하였고, 유길준에게 뜻을 알렸다. 유길준은 고종에게 박영효의 왕비암살 계획을 밀고했고 그로 인해 신응희, 이규완, 우범선 등 일행 20명과 일본으로 다시 망명하였다.

 

조선에서 계속 자객을 보냈고, 박영효는 외부 출입을 하지 않고 지냈다. 그러던 중 을미사변의 소식을 들었고, 그는 을미사변에 가담한 조선인 협력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박영효는 망명 중인 동지들과 정부를 전복하고 고종황제를 양위시킨 뒤 의화군 이강을 국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의금부에 발각되었다.

 

박영효는 1905년 을사늑약의 소식을 접하였고, 10년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조선으로 귀국했다. 같은 가문의 박제순과 교류하여 박제순 내각의 알선으로 고종의 특사조칙으로 사면을 받고 정식으로 복귀했다.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었을때,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이 고종 양위를 추진했으나 박영효는 이에 반대했다. 1907년 순종 즉위 후, 박영효는 양위식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완용의 탄핵을 받아 구속되었고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1908년 유배에서 풀려난 박영효는 경상도 마산에 머물러 있으며 1910년 한일한방을 지켜봤다. 박영효는 후작 작위를 받고 조선 귀족에 편입되었다. 1911년 은사공채금 28만원을 받았고, 조선귀족회 회장에 올랐다. 한일합방 후 정치활동은 하지 않고 기업과 은행, 토지 매입 등의 활동을 했으며 조선은행의 주요주주였다.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민족 지도자로 서명을 요청받았으나 거절하였고, 조선총독부에서도 해체 촉구 담화나 서신을 의뢰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 후 유민회, 동광회, 조선구락부, 민우회 등 친일단체와 관계를 맺었다. 1920년 동아일보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하였으나 바로 사퇴하였다.

1920년대부터는 일제에 대한 협력을 하게 되는데, 이완용이 사망하자 중추원 부의장직을 맡았고, 다시 조선귀족회 회장에 취임했다. 1930년에는 은행, 기업, 방송 등의 고문 자리를 맡았다. 1935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었다. 의친왕의 차남 이우가 일본 왕실, 귀족과 결혼을 거부하자 자기 손녀 박찬주를 추천하여 1935년 이우와 혼인시켰다.

 

1939년 사망 후, 1945년 광복이 되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묘소가 수난을 겪자 손자 박참범이 유골을 영혜옹주와 함꼐 화장하였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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