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김구의 일생과 후손들

GoodFortune 2019. 8. 19.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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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1876-1949

 

김구는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안동 김씨 김순영과 곽낙원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7대 독자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그의 아버지 김순영은 4형제였고, 조부, 증조부에게도 형제가 있었다.

 

김구는 김자점의 11대 방계 후손으로 효종 즉위 후 김자점의 옥으로 인해 해주까지 피신해왔다. 김구의 선조들은 멸문지화를 피하기 위하여 양반의 신분을 숨기고 상민으로 행세하며 살아야했다. 김구는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김구는 한글과 학문을 배웠고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김구는 상민에서 벗어나 양반이 되어 양반에게 당해온 원한을 갚고자 노력했다. 김구는 어릴적 양반집 아들들에게 심한 매질을 당하자, 집에서 큰 부엌칼을 들고 그들을 찔러 죽이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1888년 할아버지 김만묵이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 김순영은 뇌졸증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자 그의 집안은 더욱 어려워졌지만 학업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17세에 과거시험을 보았으나 낙방하였다. 그는 매관 매직의 타락상을 보고 분노하였다고 한다.

 

 

 

1893년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는데, 수개월 후 그의 휘하에 신도가 수천명이 되어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황해도 동학을 대표하게 되었고, 1894년 충북에 가서 최시형을 만나고 접주 첩지를 받았다. 그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해주 팔봉에서 거병하여 동학군을 지휘했다. 지도자 최시형을 따라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일본 군부대가 쏘는 총 소리에 놀라 모두 흩어지며 폐했다.

 

조직내 세력싸움에서 같은 독학군인 이동엽의 공격을 받아 패하여 치료를 받으며 잠적해있다가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에게로 갔다. 안태훈은 김구를 아꼈으며 그곳에서 만난 성리학자 고능선을 스승으로 만났다. 안중근은 1896년 청나라로 향했다가 단발 정지령 시행과 삼남 의병 봉기 소식을 듣고 평안북도 안주에서 길을 돌려 고향으로 귀환하게 된다. 귀환 도중 황해도 여관방에 머물렀는데 그 곳에서 한 수상한 사내를 봤다. 김구는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이라 생각했고, 을미사변의 공범이라 도피 중이라 판단하여, 그를 습격하여 칼을 빼앗고 폭행한 뒤 살해했다. 그자는 쓰치다 조스케 라는 일본인이었는데 김구의 백범일지에는 그가 일본 군인이자 조선에 밀파된 군사간첩이라 했고, 일본 외무성 자료에는 상인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이 일로 훗날 김구가 민간인을 살해했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김구는 현장에서 살인 이유를 국모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 했고, 석달 후 체포되었다. 해주 감영에서 고문당하다 인천으로 압송되었다. 김구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고종의 지시로 사형 집행이 중지되었다. 당시 전화가 개통된지 사흘째 되는날 전화로 어명이 전달되었는데, <백범일지>에서 '만약 전화 개통이 사흘만 지체됐어도 나는 스물한 살 나이로 형장의 이슬이 돼 사라지고 말았을 운명이었다'라고 썼다. 김구는 감옥 속에서 <대학>, <세계역사> 등을 읽고 감옥안의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898년 김구는 동료죄수들과 탈옥하였는데, 그가 탈옥하자 그 대신 부모가 투옥되었다. 이후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나 산사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이듬해 절을 나와 환속했다. 이후 1900년도에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 및 계몽 운동에 참여했다. 1902년에는 친지의 소개로 최여옥을 만나 맞선을 보고 약혼하였는데 이듬해 약혼녀가 병사하기도 했다. 이후 안신호(안창호의 누이)와 약혼했으나 파혼했다. 1904년 29세의 나이로 최준례와 혼인하였다.

 

 

 

1905년부터는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이는 국권회복운동을 시작했다. 대한문 앞에 모여 읍소를 하고, 종로에서 을사조약 반대에 대한 가두연설을 했다. 김구는 국민들 지식이 부족하고 애국심이 없어 나라를 지키기 어렵다 생각하여 교육에 전념하기로 했다. 1907년에는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대 조직이자 비밀결사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황해도지부 총감으로 활동했다.

 

 

1910년 11월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 모집을 하다가 황해도 신천에서 160명이 검거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안악사건이라고 하는데 이 사건에 연루되어 조선총독부에 체포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김좌진과 만났다고 한다. 김구의 이름은 본래 김창암이었는데, 후에 김창수로 개명하였고, 1912년에 김구로 재개명하였고, 호를 백범이라 정했다.

감옥 수감도중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5년 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1915년 특별 가출옥하였다.

105인 사건은 1911년 일본이 한국의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신민회원 지도자 중심인물 105명을 기소한 사건이다. 당시 윤치호, 양기탁, 이동녕, 이동휘, 전덕기 등 신민회 간부가 투옥되었다. 당시 105인 사건으로 체포 이송 중 신석규는 열사에서 투신하여 자결하였고, 한태동은 옥중에서 사망하였고, 전덕기는 고문 후유증으로 죽었다. 이 사건으로 신민회는 모두 와해되었다. 1심에서 105명 모두 유죄 선고되었으나 항소심에서 99명은 무죄, 나머지 6명은 유죄 선고되었다.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을 당수로 하여 조직된 신한청년당에 참여하였고,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경의선 열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나 상하이로 갔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내무총장 안창호를 찾아가 문지기가 되기를 청하였는데 안창호는 김구에게 경무국장 자리를 주었다. 김구는 학식이 낮음을 이유로 사의를 표시했으나 안창호는 그를 설득하였다고 한다. 김구는 경무국장으로 취임하여 정보 및 감찰, 경찰 업무를 담당하였고 일제의 밀정 검거 활동을 했다. 일본 영사관과 조선총독부의 납치, 암실기도에 시달렸다. 당시 황학선이 병원을 차리고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쌓은 뒤 한번에 독립운동가들을 잡아서 약물로 독살하려 했는데 김구가 황학선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1920년 김구

 

1920년에 아내와 아들 김인, 1922년에 어머니인 곽낙원 여사도 상하이로 건너왔다. 1922년 임시정부 내부부 총장에 취임하였고 차남 김신이 태어났다. 1924년 아내 최준례가 사망하였다. 1925년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이 사임한 후, 김은식, 이상룡 등이 잇달아 사퇴하여 임시정부는 내각 구성에 실패했고, 자금난에 시달렸다.

1926년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으로부터 국무령에 취임할 것을 권고받았는데, 그는 미천한 출신을 이유로 사양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신을 격하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동녕과 임정 요인들의 거듭된 요구로 김구는 국무령직을 수락했다. 1930년 상하이에서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 그 사이 1925년에는 어머니와 차남 김신, 1926년에는 장남 김인도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임시정부가 이승만을 탄핵 후, 이승만은 미주지역의 성금을 독식했고, 임시정부로의 송금을 막았다. 자금난에 시달려 성금과 자금을 걷으러 다녔지만 직원들의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자 일부는 생계를 위해 다른 곳에 취직을 하고 떠났다. 김구는 이승만에게 서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고, 이승만은 자금의 일부를 임시정부로 보내주었다.

 

1931년 일본 정부 및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대한통의부 산하 암살 비밀조직을 강화해 임시정부 내에 한인애국단을 결성했다. 일본어에 능한 이봉창에 찾아왔는데, 1932년 1월 이봉창을 일본 도쿄에 파견해 일본 천황에게 수류탄을 투척하도록 하였다. 2월에는 윤봉길이 입단하였고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 파견하여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현장에서 즉사하고 여러명이 부상을 입었다. 조선으로 이덕주, 유진식을 파견하여 조선총동 우카키 가즈시게 암살을 지시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봉창과 윤봉길 사건의 영향으로 중국 정보는 김구에게 생활비와 공작활동비를 제공해 주었다. 김구는 상해 신문에 상해폭탄 의거의 주모자가 본인임을 발표하고, 상하이에서 탈출하여 피신 생활을 시작했다.

 

1932년에는 이봉창, 윤봉길 의거의 배후가 임시정부의 김구라는 것이 알려지며 임시정부에 흘러오는 자금에 활기를 띄었다. 김구는 독립운동의 자금 중 상당부분을 미국의 이승만, 안창호 등과 미국 교민들의 성금에 의존했다. 독립운동가들의 이탈, 변절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임시정부를 지켜나갔다.

 

1933년에는 임시정부 창립 초기 멤버였으나 빠져나가 독립운동가들을 비난 하는 옥관빈의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난 김구가 정화암을 찾아가 옥관빈을 죽이자고 제의했고, 옥관빈을 총살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 김구는 이승만, 미주국민회와 연락을 하여 그들과 연대하게 되었다. 1938년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의 총격을 받았는데, 과다출혈로 4시간 이상 방치되어 가망이 없다고 했으나 그는 수술 후 회복했다. 가슴에 총알이 남아있어 그후 글씨체가 떨렸다고 한다.

 

1939년 김구는 각 단체의 통일을 추진하였지만, 이승만은 '김원봉, 김규식 등의 공산주의자들과 단합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했고, 민족혁명당에서도 조직을 해체하고 하나의 당을 만드는 데 찬성할 수 없다고 하여 성사되지 못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이 병사하자 김구는 주석에 선출되었다. 임시정부 최초의 정식군대인 대한민국 광복군을 조직하였다. 중화민국 주석 장제스가 광복군 통수권을 인정하지 않게 되자 중화민국 국민당군에 예속되었다. 194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의 자격으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중국내 독립운동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과,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 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분열되어 내부 갈등이 많았다.

 

김구는 1945년 일본이 항복하여 광복 소식을 접하고, 외국의 힘으로 해방된 것을 통탄해하였다고 한다. 김구는 11월 3일 한국으로 귀국했다. 귀국 당시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자격으로 귀국할 것을 원하였으나 미군정의 반대로 개인 자격으로 입국했다. 입국 전 중국 장제스가 미화 20만 달러의 금액을 김구에게 전달하였는데, 미군정은 또다른 권력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그 돈을 들여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승만과 김구

 

1945년 12월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반대하여 이승만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였다. 김규식, 안재홍, 여운형 등이 반탁에서 이탈하였다. 12월 29일 임시정부 주최로 각 정당 대표 회의가 열렸는데, 김구는 '우리 민족은 신탁통치를 받을 수 없다. 피를 흘려서라도 자주 독립정부를 우리 손으로 세워야 한다'고 절규했다. 당시 송진우는 김구와 맞서며 미군정과 정면대결을 피하게 하려 했다. 김구의 추종자들은 다음날 송진우를 자택에서 저격, 사살했다. 김구는 신탁통치 반대 성명서를 하지에게 보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하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33명은 미군정의 법과 질서유지에 복종하겠다고 맹약했음에도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빙자하여 미군을 축출하려고 하고 있다며 포로수용소에 수용하였다가 중국으로 추방하겠다' 고 발표하겠다고 하였고, 조병옥의 간청으로 막을 수 있었다.

 

1946년 1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정되자 김구와 이승만은 반대하였다. 미국은 이승만과 김구를 정치적으로 제거할 계획도 세우기도 했다. 김구와 이승만은 민족통일총본부를 설치하고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했다. 총재는 이승만, 부총재는 김구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삼일절 행사장에 백의사 청년단원들이 김일성에게 폭탄을 던졌다. 소련군 부대장 노비첸코가 오른팔이 잘리고 한쪽 눈을 다쳤지만 김일성은 무사했다. 북한측은 이 테러가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판단하고 김구와 이승만을 격력히 비난했다. 조선공산당은 김구의 귀국시 김수를 민족혁명의 지사, 고결한 지사로 예찬했지만 이 테러 이후 김구를 매도했다.

 

 

 

김구는 평소 이승만에게 우남 형님이라며 존대했다. 이승만은 장제스가 김구에게 지원하려던 20만달러를 알게 되었고, 김구는 이승만에게 이 돈을 주기로 약속한다. 임시정부 시절 이승만과 재미교포에서 받은 지원에 대한 보답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이 돈을 받기 위해 집요했다. 장제스 총통에게 전보를 보내 4~5차례 요청하였고, 미국에 갔다 돌아오는길 상하이에 들러 자금을 요청했다. 김구는 주한 중국영사관을 통해 10만달러를 임시정부 중화대사관 운영자금으로 지원하도록 했다. 이승만은 남은 10만달러를 달라고 했지만, 이후 10만달러는 김구의 아들 김신이 경교장 생활비와 백범일지 출간 비용에 사용했다.

 

서울 서대문역의 경교장 - 김구 선생이 귀국 후 암살되기 전까지 머물렀다.

 

미국의 한인 교포 노동자들과 청년층 지식인들이 정치자금과 후원금을 지원한 이승만과 비교할때 김구는 정치자금이 부족했다. 김구는 화교무역을 통해 정치자금 조달을 노력했는데, 1948년 남북한이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중국 국밍당도 내전으로 중화민국의 영토를 중국 공산당에게 뺏기게 되면서 김구의 입지는 좁아지게 되었다.

 

김구

 

이후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로 김구가 지목되었고, 김구는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피했다. 이 일로 이승만과는 결별하게 된다. 1948년 김구가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로 미군정의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김구는 남북협상에 참여할 뜻을 굳히고 북행을 결심했다. 수백 명의 청년들이 경교장 앞에 와서 북행을 막았으나 김구는 북한으로 갔다. 그는 남측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하는 이승만에 반대하면서, 북측의 공산주의에도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남북 단독정부를 하면 남한에서는 이승만, 북한에서는 김일성인데, 통일적으로 하면 김구가 대통령이 될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1949년 김구는 서울의 자택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총격당했다.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안두희의 배후는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김구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10일간 거행되었다. 김구의 국민장은 1948년 8월 정부수립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이었다.

 

김구 가계도

김구는 2남 3녀를 두었는데 3녀는 모두 어려서 죽었다. 장남 김인은 상하이에서 대한독립군 감독관이 되었으나 폐렴으로 1945년 병사했다. 김인의 부인인 안미생은 안중근의 조카이다. 차남 김신(1922-2016) 또한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해 일한 독립운동가이다. 중화민국 공군군관학교를 졸업 한 후, 1945년 귀국했다. 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대한민국 국군으로 살았다. 1962년 공군 중장 예편 후, 21대 교통부 장관이 되었다. 제 9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독립기념관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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