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일제강점기

을사오적과 그들의 후손 / 친일파 후손

GoodFortune 2019. 9. 2.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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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에서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한 다섯명의 매국노를 말한다.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다.

 

이완용 1858-1926

 

이완용에 대한 포스팅은 따로 했으니 아래 포스팅으로 대신하고 다른 4명에 대해서 기록해본다.

2019/08/13 - [아는것이힘이다/일제강점기] - 최악의 매국노 이완용 / 이완용 가계도

 

이근택 1865-1919

 

군부대신 이근택은 조선 성종의 후손이다. 1882년 구식 군인들의 연체 봉급으로 정부가 불량쌀을 지급해 일어난 임오군란 때 충추로 피신한 명성황후의 눈에 들어 형 이근호와 함께 발탁되었다. 청나라군이 개입하며 진압되었고 명성황후가 환궁하며 이근택이 벼슬길에 들어섰다. 1884년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도 수군절도서, 병조참판을 역임한 후 1897년 친위연대 제3대대장으로 정부 전복을 음모하다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 다음해 돌아와 한성판윤, 의정부 찬정을 거쳐 군부대신에 올랐다. 1910년 한일병합 조약에 협조하여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며 형 이근호, 동생 이근상이 모두 조선귀족 작위를 받았고, 아들 이창훈까지 4명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2007년 이근택과 이근상 소유의 토지에 대한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렸다.

 

이근택 가계도

 

이근택의 아들 이창훈(1980-1947)은 아버지의 자작 작위를 승계받았다. 1923년부터 1933년까지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 이사로 근무했으며 1928년 쇼와 천황의 즉위식에서 조선귀족 총대 대표로 참석했다. 1938년부터 1944년까지 조선귀족회 이사를 역임했다. 19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반민특위 조사를 받게 되었으나 이미 1947년에 사망했다. 당시 이창훈의 아들이 교사였는데 습작 여부를 조사받았으나, 이창훈이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 사망하여 작위를 습작하지 못했기에 풀려났다. 이창훈의 손자 형제는 공주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공주대 학교 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지용 1870-1928

 

내부대신 이지용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종손이며 흥선대원군의 형 흥인군 이최응의 손자이자 고종의 5촌 조카이다. 1887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895년 칙명을 받아 일본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궁내부 협판을 역임하다가 1901년 주일 공사가 되었다. 1903년 일본과 협상하여 대한제국이 일본을 돕도록 하는데 힘썼고, 1904년 하야시 곤스케로부터 1만 엔을 받고 한일의정서에 협조했다. 1905년 내부대신으로 을사 조약 찬성에 서명하였고,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고문에 임명되었다.

1928년 사망하면서 그의 작위는 양손자 이영주(1918~1955)가 습작했다. 이지용은 일제 강점기 조석귀족 중 가장 부유하게 살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2007년 이지용 소유의 토지에 대한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렸다.

 

이지용 가계도

 

 

박제순 1858-1916

 

외부대신 박제순은 1883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86년 청나라 텐진주재 조선공사관에 부임했다. 1893년 동학교도들이 보인집회를 열자 중전 민씨는 청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했는데 박제순은 청나라에서 파견된 위안스카이를 만나 청나라 군사 파병 문제를 의논했다. 이후에도 박제순은 청나라와 계속 교섭했다. 1887년 귀국하여 호조참의, 형조참판, 이조참판을 거치고 예조참판을 역임하고 한성부윤으로 부임했다.

 

1893년 동학교도들이 보은집회를 열자, 중전 민씨는 청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했다. 박제순은 이때 청나라에서 파견된 위안스카이를 만나 청나라 군사 파병 문제를 의논했다. 이후에도 청나라와 계속 교섭했다. 1895년 이후 외부협판, 중추원의관, 외부대신, 육군참장을 지냈다. 1902년 청국 주재 공사로 파견되어 베이징에 있다가 1904년 귀국하여 외무대신에 임명되었다. 1905년 일본의 강압에 못이겨 을사늑약에 찬성을 하여 을사오적이 되었다.

 

 

1907년 중추원 고문이 되고,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내각이 들어서자 내무대신에 기용되었다. 1909년 이완용이 고종 양위 사건으로 노상에서 저격당하고 입원하자 임시내각총리대신 서리가 되었다. 1910년 내부대신으로 한일합병 조약에 서명했다.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박제순은 1916년 병으로 사망하였고, 박제순의 장남 박부양(1905-1974)은 중추원 서기관을 지냈고, 일제 강점기동안 부유하게 살았다. 박부양은 19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반민특위 조사를 받고 검찰에 송치되었으나 반민특위 활동이 무산되면서 처벌 받지 않았다. 2002년 친일파 명단과 2008년 친일인명사전에 박제순과 박부양이 모두 선정되었다.

 

박제순 가계도

 

박제순의 손자이자 박부양의 아들 박승유(1924-1990)는 을사오적 후손 중 유일한 독립운동가였다. 박승유는 아버지 박부양의 권유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중국 저장 성 이우에 주둔한 횡정부대에 배속되었으나 다음해 탈영하여 한국 광복군에 입단했다. 광복 후에도 계속 대한민국 육군에 남아 있다가 1950년에 대한민국 육군 상사로 예편하였다. 그뒤로 정치가 겸 서예가로 활동하다 66세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권중현 1854-1934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일찍부터 일본어를 익혀 개화파에 가담했고, 초기에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1883년 일본 주재 서기관을 거쳐 1899년 법부대신에 올랐다. 1901년 군부대신을 맞고 1902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의 교장 임시 서리가 되었고 1903년 육군법원장에 임명되었다.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의 위문사로 파견되는 등 일본의 승리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서보대수장을 받았다. 1905년 농상공부대신으로 을사늑약에 찬성하였고, 1907년에 을사오적 암살단과 강원상의 암살기도의 위험이 있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 뒤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았고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과 조선사편수회 고문을 지냈다.

 

권중현 가계도

 

2002년 친일파 명단과 2008년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양자인 권태환(1876-1947)과 함께 선정되었다. 권태환은 1902년부터 대한제국의 관리로 근무하였고 한일병합 조약이 체결된 후 공로자로 인정받아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받았다. 조선총독부 중추원에 부찬의로 들어가 참의로 승격되었고 일제 강점기 동안 고위 관료 및 기업인으로 활동했다. 1934년 권중현 사망 후 자작 작위를 습작했다. 1960년 한 잡지가 조선귀족 후손들의 근황을 취재하였는데 권중현의 손자가 당시 고미술협회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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