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일제강점기

미국에서의 독립운동가 서재필

GoodFortune 2019. 8. 17. 21:39
반응형

서재필

1864-1951

 

서재필은 1864년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대구 서씨 서광효로 관직에는 나가지 않았다. 7살이 된 후 양부 서광하에게 입양을 보냈는데, 서광하는 1872년(고종10) 한성에서 이조참판을 하고 있던 동생 김성근의 집으로 서재필을 보냈다. 김성근의 집에 머물면서 학문을 배웠으며 서광범과 김성근의 일족인 김옥균을 만나게 되었다. 또한 김옥균을 통해 박영효도 만나게 된다. 김옥균과 서광범을 통해 수학, 망원경, 지구본, 지도, 화약 등 새로운 문명을 접하게 되었다.

 

1879년 경주 이씨와 결혼하였으나 사별하였고 1881년(고종18) 김영석의 딸 광산 김씨와 재혼하였다.

1882년(고종19) 급제한 후 경서 인쇄 및 관인을 관리하는 '교서과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다시 서광범, 김옥균 등을 만나게 되고 김옥균이 만든 충의계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개화파 박영효, 홍영식 윤치호 등을 만나게 되었다. 개화파는 한성부 봉원사를 중심으로 결속하였는데 개화파 승려인 이동인이 주지로 있었다. 이동인은 책, 사진, 성냥 같은 것을 일본에서 사왔고, 역사책, 지리, 물리, 화학 서적도 보여주었다. 그들은 봉원사에 모야 서양 문물에 대한 책을 읽고 시국을논하며 개화당을 발전시켜왔다.

 

서재필의 젊은 시절

 

1883년 훈련원 부봉사가 된 서재필은 14명의 평민 출신 청년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갔다. 게이오 의숙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배우고, 영어를 배웠다. 일본의 선진 문물과 제도, 군사 시설과 경찰 제도에 대해서도 유심히 살펴보았다. 토야마 육군 하사관학교에서 신식 군사 훈련도 받았다.

다음해 조선으로 돌아온 서재필은 고종에게 신식 사관학교를 설립할 것을 간청하였고, 조련국을 만들 것을 건의하였다. 서재필은 조련국 사관생 교관으로 배치되어 신식 병사 양성을 맡았다.

1884년 10월부터 우정국 낙성식을 기회 삼아 개화당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홍영식과 갑신정변을 계획했다. 신분체 폐지, 문벌 폐지, 청나라 심양에 잡혀간 대원군의 복귀를 담은 개혁을 발표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에서 사관생도를 지휘하여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역할을 맡았다. 11월에 개화당 동지들과 모여 거사를 모의하였는데 당시 조선 주둔 일본군 중대장 무라카미를 찾아가 협조를 부탁했다. 12월 4일로 거사일이 정해졌고, 개화당은 고종을 경운궁으로 옮긴 후 입구를 지키고 고종이 보는데서 조영하, 민태호, 민영목 등을 처단했다. 다음날 개화파는 개화 신내각을 발표하였으나 외척 민씨 측에서 청나라에 연락하여 청나라 군대가 개입을 하게 되었다.

갑신정변은 며칠만에 실패로 돌아섰고,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갑신정변 일당 9명을 피신시켜 그들은 일본으로 갈 수 있었다.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역적으로 몰렸고 서재필의 가족과 친족들은 모두 살해당했다. 기생으로 보내지기로 된 서재필의 부인은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고, 두살난 아들도 죽었다고 한다. 딸은 노비가 되었다 풀려났는데 안동 김씨 김태균의 아들 김두진과 결혼하였다. 당시 김옥균과 서재필의 집은 인접해있었는데 그들이 몰수당한 후 관립한성고등학교의 부지가 된다. 현재 정독도서관 터이다.

 

갑신정변으로 청일 사이에 문제가 생기자 일본에서도 그들에게 냉대하는 이들이 생기자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미국에서 적응하지 못한 박용효는 일본으로 바로 돌아갔고, 서광범도 뉴욕에 체류하며 지내다 힘든 일을 견디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서재필은 막노동, 식당, 청소부, 전단지 들 잡일을 하면 견뎌야 했고,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에 시달리고, 열차 탑승시에도 짐칸에 타는 등 모욕을 견뎌야만 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미국으로 자객을 보내기도 했는데, 서재필은 가족이 몰살당하고 자객을 보내는 조선에 대해 배신감과 증오만 남게 되었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기독교를 믿으며 교인들의 도움으로 해리힐맨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미국의 역사와 민주주의에 대해 배웠는데 졸업식에서는 졸업생 대표로 고별 연설을 할 정도로 우등생이 되었다. 워싱던 D.C.의 컬럼비안 대학 예과와 코크란 단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라파예트 대학교에 입학했다. 문구점을 운영하여 낮에는 문구점에서 일을 하고, 저녁에는 대학에 다녔다고 한다. 1889년에는 컬림비안 대학 의과대학 야간학부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였고, 미국에서 한인 최초 세균학 전공 의학 박사가 되었다. 또한 1890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이 때문에 미스터선샤인의 유진 초이의 모티브가 서재필이라는 이야기가 있기도 하다.

 

서재필 부인

 

1894년에는 미국 초대 철도우체국장의 딸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을 만나 가정교사가 되었는데,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스테파니와 뮤리엘을 두었다. 1894년에는 병원 개원을 하였으나 인종차별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후 김옥균의 암살 소식과 부관참시 소식을 접했다. 조선은 상하이에 자객을 보내 김옥균을 암살하고 시신을 환국시킨 후 능지처사 한것이다. 기사를 접한 서재필은 조선에 대한 분노가 커져만 갔다.

 

1894년 김홍집 내각이 들어오면서 개화파 인사들이 복권되었으나 서재필은 귀국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895년 미국에 방문한 박영효를 10년만에 만나게 되고, 그는 다시 조선을 개혁해보겠다는 생각을 품고 귀국을 결심했다. 하지만 조선에 대한 분노가 있던 그는 관직을 모두 사직하였고, 영어로 대화하고 독립문 기공식 떄에도 영어로 연설했다. 양부인 서광하가 찾아왔을 때에도 외면하였다고 한다. 양복 차림으로 안경을 끼고 입궐하여 고종과 명성황후 앞에서 절하지 않은 채 고개를 들고 악수를 청하였다. 이를 지켜본 박정양, 박영효, 김홍집, 유길준, 윤치호는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이름을 서재필이라 하지 않고 Philp Jaisohn 이라고 했다.

 

 

귀국 후 연설에서 서재필은 조선은 자주국임을 전제하고 조선이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의 식민지와 같이 생활을 하였으며 청나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실패 이유가 민중의 무지와 몰지각 떄문이라 하였고, 주변에 항상 미국인 행세를 한 까닭에 개화당 동지들에게 반감과 거부감을 주게 되었다. 윤치호 일기에 "그의 미국인 친구 고우는 그와 함께 거리를 걷다가 그가 가까이 오는 거지를 발길로 걷어차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라고 기록했다. 그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멸했고, 수구파 대신들의 비리를 검침없이 질타하였다. 또한 무지한 민중들에 대한 혐오와 경멸감을 감추지 않았다.

 

 

서재필은 황제가 임명한 의원 일부와 국민 대표자로 구성된 중추원을 국회로 개조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는 일본공사 코무라에게 자신은 중추원 고문으로 법률 제정과 심의하는 인력들을 키울것이라고 말하였다. 서재필은 대한제국 정부의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고, 이후 신문 간행을 하려 노력하였다. 서재필은 신문이 민중 계몽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1896년 한국 최초의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당시 사회계약론을 소개하며 조정이 인민의 재산과 행복을 지켜주는 조건부로 조정에 충성하는 것이라 하였다. 임금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당연시하던 백성들은 그의 사회계약론을 괴상하게 취급하였다.

 

서재필은 고종황제를 만날때 항상 안경을 썼는데, 당시 조선에서는 임금 앞에서 안경을 끼면 불경죄였다. 1920년까지도 어른 앞에서 안경을 끼면 무례한 것이었다 한다. 그는 '미국시민권을 얻은 외신'의 신분이라고 고집하면서 안경을 벗지 않았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도 서재필이 고종 앞에서 안경을 쓰고 담배를 피운 채 면대한다며 정신이상이라고 소문이 돌기도 했다.

 

1896년 서재필은 안경수,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남궁억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근대 시민단체 독립협회를 만들고, 첫 사업으로 독립문 건립 계획을 수립한다. 초대 회장은 안경수, 위원장은 이완용이었다. 당시 영은문은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치욕스러운 존재라고 하여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1897년) 독립문은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만들어졌다. 서재필은 고종의 아관파천에도 비관적이었다. 아관파천으로 러시아는 대한제국에 군사적, 정치적 압력을 확대했다. 서재필은 러시아의 대한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쓰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 고문단의 철수를 요구하기도 했다. 서재필은 의무 교육도입, 서양 과학 기술 도입을 위한 안들을 제시하고, 러시아와 일본에서 독립하여 중립 외교를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일반 민중이 쉽게 읽도록 독립신문에 쉬운 한글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당시 국문학자인 주시경을 영입하여 순한글로 간행할 수 있었다. 일본과 러시아는 독립신문 운영에 비판적이었고 조선 정보에 압력을 넣어 독립신문 후원금을 막았다.

 

서재필은 배재학당에 출강해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김규식 등의 젊은이들에게 세계사를 강의하며 자유 민주주의와 참정권, 인권, 사회 계약론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서재필은 비용없이 젊은이들을 신분 차별하지 않고 가르쳤다. 서재필은 이승만과 오래도록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서재필은 초기 관료 중심의 독립협회를 대중 토론회로 조직하였고, 이는 만민공동회로 발전하였다. 또한 의회 설립 및 입헌군주제로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정부 관료들은 황제에 불충하는 선독을 한다고 비난했다. 수구파는 서재필을 제거하고자 하였지만 미국 시민권자였기에 외교문제를 우려하여 실행하지 못했다. 1897년(고종34) 서재필은 한 강연에서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임금이나 아버지를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에서 노비 해방에 대해 배운 서재필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노비 해방 문제를 공론화시켰다. 많은 회원들이 찬성편에 서서 발언하였고 그들은 소유한 노비를 모두 해방시키도록 하는 동의를 가결시켰다. 독립협회의 결의에 따라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을 석방시키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898년 수구파 대신들이 보낸 자객이 침입하였으나 미국인 경호원의 총격을 받고 달아났고, 김홍륙 등이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독살하려 하자 피신하기도 했다. 1898년 서재필은 독립협회의 회장이 되었다. 당시 주조선 러시아공사 스페이어는 독립협회가 러시아의 절영도 할양 요구를 반대하는 구국선언 상소를 올리고 언론에 공표한 것을 두고 미국공사 알렌을 방문해 항의하고 서재필의 소환을 요청했다. 또한 일본과 러시아의 압박에 대한제국 정부는 그를 중추원 고문 직에서 해고했다. 러시아 공사관의 계속된 항의에 결국 서재필은 미국으로 추방되었고, 윤치호에게 독립협회 권한을 일임했다.

 

당시 서재필은 조선정부에 계약 위반과 해촉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다. 10년 계약으로 조선 정부의 고문으로 왔으나 2년 2개월만에 떠나게 된것이었다. 계약기간의 봉급과 돌아갈 여비로 조정으로부터 2만 4400원의 위약금을 지불 받았다. 서재필은 자신을 박해하고 자객을 보낸 대한제국 조정에 대해 분노하며 지인들에게 '귀국 정부가 나를 필요없다고 하여 가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서재필의 영향으로 독립신문에 있던 이승만, 김규식 등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도 했는데, 서재필은 이들에게 학비를 도와주기도 하였다. 서재필이 출국한지 7개월만에 독립협회는 해산되었다.

 

1898년부터 1900년까지 조선에서는 서재필과 유길준, 김윤식 등을 사형에 처해야한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왔고, 그가 을미사변에 개입된 인물이라는 상소까지 올라왔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온 후 미국-스페인 전쟁에 군의관으로 참전, 해부학 강좌 강사, 병리학 연구원 등으로 바쁘게 지냈다. 독립협회의 실패 소식을 들었고,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참정권 요구 등을 역적 취급하는 민중에게 실망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서재필은 조약을 파기하라며 을사 조약에 반대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황제에게 전달되지 못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1918년 대한인국민회 중앙회장으로 있던 안창호에게 보낸 서신에 아래와 같이 써서 조선의 백성들의 무지함에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오늘날 조선의 백성은 승전국 일본의 노예가 되어 구차한 명을 보전하고 있소. 그럼에도 아직 누구 하나 창피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일본의 학대에 저항하며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려는 자가 없소. 그러니 바깥 세계에서 조선인을 위해 불쌍하다며 동정을 표하는 자가 없는 것이오."

 

재미한인들의 활동이 점점 활발해졌고 서재필은 한인 지도자 중 한사람이었다. 1919년 3.1만세운동을 듣고 만세 시위에 뛰어든 학생들에게 감동받았다. 서재필은 자신의 전 재산을 정리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바치고, 미국 잡지 <이브닝 레저>를 찾아가 조선 문제를 다룰 것을 요청했다. <이브닝 레저>에서는 한국의 독립을 세계 여론에 알렸고, 일본 군국주의를 규탄하는 칼럼을 기고했다. 서재필은 독립운동을 위하여 7만 6천 달러를 모두 투입했다. 1915년부터 독립된 상점을 운영하였는데 이 자산들 또한 독립운동에 바치고 파산하였다.

 

1919년 서재필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를 소집하였고 여기에 이승만, 정한경, 유일한 등 150여명의 한인들이 참석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구미외교위원회가 설치되자 한인통신부를 설치하였고, 미국에 일본의 만행을 소개하고 독립의지를 표현하는 <한국평론>을 월간으로 발간했다.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개최된 워싱턴 군축회의가 있었는데, 이승만과 서재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으로 평화군축회에 파견되었다. 그들은 조선 독립문제를 국제회의 석상에서 다루어줄 것을 요구하는 한국독립청원서를 제출했지만 일본의 방해와 미국의 반대로 무산됐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국민회와 이승만을 중심으로한 국민회 이탈파 및 동지회 계열이 갈등하기도 했다.

 

1924년 5월 유일한이 정한경 등과 류한주식사회유한양행 전신)을 설립하고 서재필을 초대사장으로 추대하여 2년간 류한주식회사의 사장을 하기도 했다. 이후 1926년 유일한은 정동에 유한양행을 건립하면서 류한주식회사는 소멸되었다. 유일한이 귀국할때 조각가인 서재필의 딸이 버드나무 목각화를 만들어 선물로 주었는데, 그것이 유한양행의 상표가 되었다.

 

1926년 순종이 사망하였고, 미국내 독립운동은 안창호파, 이승만파, 박용만파 파벌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서재필은 생계가 어려웠기에 고용 의사 생활을 계속 하며 삼일신보와 미국의 언론에 칼럼과 기고문을 게재하며 독립 청원을 계속했다. 그러면서도 1929년에 병리학 전문의 시험에 합격하여 한국인 최초의 미국의사가 되었다.

 

 

생업에 종사하며 지내던 서재필은 1932년 안창호가 체포되어 조선으로 송환되면서 한인교민사회의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국내의 윤치호, 김성수, 송진우, 이광수, 조병옥 등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국내 정세에 대해 소식을 들었다. 1938년 안창호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장례식 참석차 한국에 방문하기도 하였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77세의 나이로 미군 징병검사 의무관으로 자원봉사활동을 하여 미국 국회로부터 공로훈장을 받기도 했다.

 

1948년 서재필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9월부터 미군정이 실시되었고 10월 미국에 체류하던 이승만은 귀국했다. 서재필은 출국하는 필라델피아 공항까지 직접 마중나와 이승만 내외를 배웅하였다. 이승만을 견제하기 위해 미군정청 사령관 하지 중장은 서재필에게 여러 차례 귀국 요청을 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김구에 맞서는 지도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미군정은 서재필의 한국 입국을 추진했고, 몇 차례 고사했던 서재필은 1947년에 한국으로 귀국했다.

 

서재필의 환영식을 위해 3.1운동 33인의 한 사람인 오세창을 환영회 위원장으로 5만명 정도의 시민들이 참석하였다. 당시 서재필은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은 비누 한 장도 만들 줄 모르면서 어떻게 독립 정부를 갖기를 기대할 수 있는가' 라고 하였다. 그는 조미특별의정관이라는 직책에 취임하였고, 라디오 연설을 통해 민주주의, 교육,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때에도 그의 연설은 영어로 이루어졌고, 그는 한국말을 잊어버렸다고 인정했다.

 

이승만은 처음에는 서재필을 환영하였으나,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서재필이 귀국한것임을 알고 그를 냉대했다. 서재필은 귀국 후 과도입법의회 의장 김규식과 긴밀하게 협력하였다. 서재필은 정치활동에 참여하기를 사양했으나 1948년 3월 이승만을 겨냥해 극우적인 운동, 거짓말, 거짓 선전을 한다며 비난했다.

 

흥사단 계열과 미국 유학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서재필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48년 7월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이 결정나고 대통령 선거 일정이 잡히자 정인과, 백인제, 최능진 등이 서재필의 대통령 후보자 출마 운동을 주도했다. 독립촉성국민회에서는 서재필이 미국 국적임을 문제 삼았는데, 이에 백인제, 최능진, 김대중 등 1929명이 서재필에게 출마 요청서를 보냈으나 서재필은 불출마를 선언했다.

 

미국으로 돌아간 서재필은 다음해 후두암과 방광암 진단을 받았다. 1950년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였다. 주미 한국대사 장면은 수시로 문병하였고, 1951년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