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일제강점기

일본 대훈휘 국화대수장을 받은 왕족 (영친왕, 이건, 이우)

GoodFortune 2019. 8. 14. 17:27
반응형

대훈휘 국화대수장은 일본의 훈장 가운데 하나로 1876년 12월 27일에 제정되어 최고위인 대훈휘 국화장경식에 뒤잇는 훈장이다. 영국의 가터 훈장, 스웨덴의 세라핌 훈장, 덴마크의 백상 훈장과 같이 왕실 국가의 대부분이 일반 훈장 상위에 최고위 훈장을 두었고, 이를 모방하여 제정하였다.

 

대훈휘 국화대수장을 받은 한국인은 4명으로 매국노 이완용과 왕족 3명이다. 영친왕 이은은 1920년 4월 27일, 이건은 1940년, 이우는 1943년 그리고 이완용은 1926년에 대훈휘 국화대수장을 수상했다.

 

일본의 군인으로 살아간 영친왕 이은과 의친왕의 아들 이건, 이우는 어린시절 일본으로 가서 학교를 다니고 일본의 군인이 되었다.

 

고종 후손 가계도 (생략있음)

 

영친왕 이은

 

우리나라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태자 영친왕(이은)은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어머니는 손헌황귀비 엄씨이다. 1897년(고종34) 태어나 1900년 영친왕으로 책봉되었다. 궁인이었던 엄씨는 이은의 출생으로 1897년 귀인, 1900년 순빈, 1901년 순비 1903년 황귀비로 책봉되었다.

1902년 대한천일은행(현재 우리은행) 제2대 은행장으로 5살 이은이 임명되었다. 당시 대한천일은행은 한성의 유력 상인들이 주도하고, 고종이 내탕금 3만원을 지원하며 설립되었다.

 

1906년 12월 7일 황족과 귀족 자제의 교육을 위해 설치된 근대 교육기관 수학원에서 강학을 받기 시작하였고, 그해 태황제 고종의 조서에 따라 순종의 황태자로 9살의 이은이 결정되었다. 황자 서열로는 순종 다음이 의친왕 이강이었으나 순헌황귀비의 견제가 있었기에 황태자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황태자 이은은 일본 유학을 가게 되었고 조대호, 서병갑, 엄주명이 동행했다. 엄주병은 황귀비 엄씨의 조카였다. 당시 영친왕부인에 대한 초간택이 이루어져 민영돈의 딸인 민갑완이 황태자비로 선발되었으나 이은의 일본 유학으로 파혼하게 되었다. 민갑완은 상하이로 망명을 떠나 평생 수절하였다 한다. 1907년 12월 도쿄로 간 이은은 1908년 이자부 도리이자카의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고 개인 교습을 받았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황태가 유학을 담당하는 보육총재로 임명되었고, 그가 죽자 이와쿠라 도모사다를 보육총재로 임명했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자 이은은 황태자에서 왕세자로 격하되다. 1911년 모친인 황귀비 엄씨가 사망하자 귀국하여장례를 치루고 돌아갔다.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의 시험을 치르고 191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17년에는 일본 제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16년 이은은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와 약혼하였다.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계획된 혼인이었다. 일본 황실의 제도와 구성에 대해 정하는 법률인 <황실전범>에 의하면 일본 황족은 조선 왕족과 혼인이 불가능했다. 1918년 "황족 여자는 왕족 또는 공족에게 시집갈 수 있다"고 제정하였고 1920년 이은의 저택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독립신문>은 원수의 여자와 결혼한 금수이며 적자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1920년 일본 대훈휘 국화대수장도 받았다.

 

이은은 1920년 일본 육군대학교에 입학하였고, 1921년 장남 이진을 낳았다. 1922년 이은은 마사코와 이진과 함께 귀국했는데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날 덕수궁 석조전에서 이진이 급사하였다. 순헌황귀비 엄씨의 묘 영휘원 옆에 장사지내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후 1931년 차남 이구를 낳았다.

 

1926년 순종의 병세가 악화되자 마사코와 덕혜옹주와 함께 귀국한 이은은, 순종이 승하하자 다이쇼 천황의 칙령에 따라 왕위를 계승했다. 순종의 장례가 끝난 후 일본으로 돌아갔고 1927년 이은 부부은 유럽여행을 떠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은이 중국 상하이에 들르는 것을 기회로 삼아 납치할 계획을 세웠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이은은 1923년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군대에서 있으며 진급하여 1935년에는 우츠노미야 보병 제59연대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1937년 3월에는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었고, 교수부장까지 하였다.

 

이은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의 문화재 보존의 필요성을 느끼고 조카 이우 등을 통하여 민요와 창극이 수록된 레코드판, 문화재와 민속품을 구해오도록 부탁하였다. 수집품들은 이왕가 미술관을 거쳐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은은 1945년 8월 12일에 쇼와 천왕으로부터 항복의 뜻을 전해들었고, 8월 15일 도쿄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황족들의 면세특권을 박탈당해 경제적 위기가 왔고,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일본인은 한국인이 되었다. 이은과 마사코는 재일한국인으로 등록하였지만 이승만 정권은 호적이 없다는 이유로 대한민국 국적을 이정하지 않아 무국정 생활을 하게 되었다. 당시에 황실 후손들은 일반 호적과 별도의 호적을 갖고 있었는데 대한민국 정부에서 황실 호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이은은 고급 요정에서 술상을 차려놓고 게이샤를 모델로 누드를 그리는 것에 심취하였다고 한다. 이은은 일본에 유학을 가고 일본의 군인이 되고 일본의 장군이었던 점으로 친일파로 몰려 지탄받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이은은 주일 대한민국 대표부를 통해 여러 차례 귀국 의사를 전했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대응하지 않았다. 1950년 2월 일본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과 만나 귀국 의사를 전했지만 이승만 대통령도 냉담한 반응이었다. 1950년 8월 차남 이구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54년 대한민국에서 <구황실재산처리법>이 제정되어 대한민국 황실의 재산을 모두 국유화하고 황족의 직계와 배우자에게 생활비가 지급되도록 하였는데 이은은 제외되었다. 1957년 차남 이구가 매사추세츠 공대를 졸업하자 이은은 마사코(이방자)와 미국을 방문하였는데, 여권 발급이 이루어지지 않아 일본 여권을 사용하였다. 미국 뉴욕에서 체류하던 중 고혈압에 의한 뇌일혈로 쓰러졌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아들 이구가 미국인 줄리아 멀록과 결혼을 하는데, 미국에 가기 위해 여권 발급을 대한민국에 요청하지만 성사되지 않자 일본으로 귀화했다.

 

대한민국에서 4.19 혁명으로 제2공화국이 출범하자 국무총리 장면은 이은의 귀국에 호의적이었다. 1961년 5월 이은은 중태에 빠져 입원하였고 당시 박정희가 이은의 치료비와 생활비를 지원하였다. 1963년 이은은 혼수상태인채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였고, 건강도 회복되었다.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했지만, 1970년 또다시 의식을 잃었고 창덕궁 낙선재에서 사망하였다.

 

의친왕 장남 이건

 

의친왕의 장남인 이건은 1909년 대한제국 한성부에서 태어나 1921년 유학 명분으로 일본에 보내졌다. 1923년 일본에서 초등과를 졸업하고 193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1938년 육군대학교를 졸업했다. 1926년 일본 황실령으로 왕, 황세자, 왕세손, 공은 만 18세에 달한 후 육군이나 해군 무관으로 임관하여야 하는 의무가 강제되었다. 일본육군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이건, 이은, 이우, 홍사익 4명이 있었다.(홍사익은 대한제국 육군 참위로 임관되었다가 1907년 군대가 폐지되지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1931년 10월 영친왕비 이방자의 외사촌 마쓰다이라 요시코(세이코)와 혼인하였다. 이건은 해방 전까지 일본 군대에 있으며 중좌까지 진급하였다. 1940년에 일본의 최고위 훈장인 대훈휘 국화대수장을 받았다. 1947년 평민이 되며 이건은 모모야마 겐이치로 개명하였고, 2남 1녀 모두 일본이름으로 개명하였다. 생계를 위해 도쿄 시부야에서 단팥죽과 산양젖을 팔거나 긴자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는 등 장사를 했다. 후에 장남 다다히사가 본인의 아이가 아님을 알게 되고 1951년 이혼을 하게 된다.

두번째 부인 마에다 요시코를 만나고 1955년 일본으로 귀하했다. 아들 모모야마 고야를 낳고 1990년 12월 일본에서 사망했다.

 

의친왕 차남 이우

의친왕의 차남인 이우는 1912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 생모는 의친왕의 측실 수인당 김흥인이다. 1917년 흥선대원군의 장손 이준용이 사망하자 이우는 이준용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1922년 유학 명분으로 일본에 보내졌고, 형인 이건과 마찬가지로 의무에 의해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한다. 1933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육군대학교를 졸업했다.

 

일본인과 결혼을 강요하던 일본 궁내성과 이왕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친왕과 박영효의 지원을 받아 박영효의 둘째 서자 박일서의 딸 박찬주와 1935년에 결혼했다. 이우는 박찬주에게 사주단자와 약혼반지를 보낸 후 당시 이왕직 장관 한창수에게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는데, 천황의 칙허없이 진행되었다고 반발하며 일본 황족과 결혼하라는 압력을 행사했다. 이우는 조선인과 결혼하겠다고 저항했고, 박영효가 일본 정계를 상대로 벌인 로비의 결과로 혼인을 인정받았다. 1936년 장남 이청이 도쿄에서 태어났고, 1940년 차남 이종이 태어났다.

 

1943년 이우는 대훈휘 국화대수장을 받고, 1945년 중좌로 진급하였다. 그해 운현궁에 한달간 머무르며 "일본의 패전은 기정사실이며 한국이 독립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라고 하였다. 1945년 히로시마로 전출되었는데 8월 6일 말을 타고 출근하는 도중 시 중앙부 후쿠야백화점 부근에서원자 폭탄에 피폭되었다. 얼굴에서 가슴까지 화상을 입은 이우는 다음날 사망하였다.

 

이은, 이건, 이우 모두 일본 군인으로서의 삶을 살았기에 친일 논란이 있지만 민족문제연구소는 볼모의 처지였다는 것을 감안하여 친일인명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