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일제강점기

황실의 독립운동가 의친왕의 일생 (의친왕 가계도)

GoodFortune 2019. 8. 14.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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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1955

 

의천왕 이강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귀인 장씨 소생의 서자로 1877년(고종14)에 태어났다. 어머니 귀인 장씨는 명성황후의 혐오를 사서 귈 밖으로 쫓겨나 궁 밖에서 살다가 1900년 숙원에 추증받고 1906년 귀인에 추증되었다. (영친왕의 모후인 귀비 엄씨 또한 명성황후에게 쫓겨났다가 명성황후 시해 후에 입궁했다)

 

1981년 의화공에 책봉되었고, 1892년 의화군에 개봉되었다. 1893년 김사준의 딸 김수덕과 혼인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승리 축하 대사가 되어 일본을 방문했다. 1897년 의화군에서 의왕에 책봉되고 1900년 의친왕에 진책되었다. 이후 일본 유학을 하여 일본의 게이오 의숙을 거쳐 1899년 미국으로 갔다. 1901년 버지니아주 세일럼의 로노크 대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 및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를 돌아다니며 학업하였다.

190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 부장이 되었다. 1906년에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고, 대한제국 최고의 훈장인 금척대훈장을 수여받았다. 황자 서열로 순종 다음이었으나 순헌황귀비의 견제로 황태자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고 이복동생 영친왕 이은에게 밀려났다.

 

의친왕 이강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의친왕에서 이강 공으로 강등당했다. 주색에 빠진 폐인행세로 일본의 감시를 피하며 독립 투사들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11년 11월에는 33인의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11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의친왕은 독립운동가 및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지사들과 연락하여 망명 정부가 수립되면 황족으로서의 예우를 버리고 일개 신민의 자격으로 정부를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1919년 일진회에서 활동하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전협, 대돈단의 최익환 등과 협의하여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서 독립운동을 할 것을 결심했다. 상하이로 가기 위해 상복을 입고 시도하다가 만주 안동에서 일본 경찰에 잡혀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한제국 황족들에게 허용되었던 한반도 내 여행의 자유를 박탈당하게 되었다. 의친왕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아래 편지를 보냈다.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하고, 아울러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몸바치기를 원한다.

 

1919년 11월 20일 독립신문 기사에 "의친왕 전하께서 상해로 오시던 길에 안동에서 적에게 잡히셨도다. 전하 일생의 불우에 동정하고 전하의 애국적 용기를 칭송하던 국민은 전하를 적의 손에서 구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통분하리로다" 라고 쓰여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 정부에 보고하여 의친왕에게 부여되었던 이강 공이라는 공족의 작위를 박탈했고, 그의 공위는 장남 이건에게 습공되었다. 1940년 창씨개명령이 떨어졌을 때도 창씨개명을 거절하며 배일 정신을 지켜냈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 1947년부터 1949년까지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겸 전임고문 직위를 염임한 것 외에는 정치적 의사표현을 삼갔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황실을 배척하여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 1950년 한국 전쟁으로 피난을 갔다 휴전 협정 후 서울로 돌아왔다. 그 후 사동궁 별궁에서 거주하였으나 황족으로의 어떤 예우도 받지 못했다.

 

1955년 8월 16일 안국동의 별궁에서 영양실조 후유증과 스트레스 등의 합병증으로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의친왕은 1893년 혼인한 덕인당 김씨(김수덕) 외에 13명의 후실과 12남 9녀의 자녀를 두었다. 일부 측실은 황손을 의친왕에게 맡기고 재혼한 여성도 있었다. 의친왕비 김씨는 황손들을 직접 키우며 사동궁에서 거주했다.

 

아래는 의친왕의 가계도이다.

의친왕 가계도

 

의친왕의 자녀들은 다른 종친들의 양자로 입양되었는데, 2남 이우는 흥선대원군의 적장손인 이준용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1남과 2남은 일본으로 유학을 빌미로 볼모로 가게 되어 일본의 군인으로 살게 되었다.

 

2019/08/14 - [아는것이힘이다/일제강점기] - 일본 대훈휘 국화대수장을 받은 왕족 (영친왕, 이건, 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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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훈휘 국화대수장은 일본의 훈장 가운데 하나로 1876년 12월 27일에 제정되어 최고위인 대훈휘 국화장경식에 뒤잇는 훈장이다. 영국의 가터 훈장, 스웨덴의 세라핌 훈장, 덴마크의 백상 훈장과 같이 왕실 국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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