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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7공화국 제14대 대통령 김영삼, 김영삼 가계도

GoodFortune 2019. 9. 2.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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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1927-2015

 

1927년 경상남도 거제도에서 아버지 김홍조와 어머니 박부련 사이의 1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거제도에서 멸치어장을 소유하던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어머니 박부련은 1960년 무장공비 2명에 의해 살해되었고, 아버지 김홍조는 최남순과 재혼하였으나 또다시 사별하였다. 아버지 김홍주는 1985년 이수남과 재혼하였다. 일제강점기 말(1940년) 창씨개병이 강요되었던 시절에 '가네무라 고유'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다. 8세에 장목소학교에 입학하였고, 1940년 통영중학교에 입항하였다. 중학교 시절 일본 학생들과 마찰을 빚어 키타지마 교장은 김영삼을 혹독하게 대했다. 교장이 진해중학교로 전근을 가게되어 학생들에게 선창가 배로 이삿짐을 나르게 하였는데 이때 귀한 설탕을 나르면서 일부러 부대종이를 뜯어 설탕을 흘리며 날랐다고 하여 무기정학을 받았다. 교사의 조치로 위기를 모면하였는데 3학년 때 또다시 '노동보국'이라는 이름의 강제노통을 하며 일본인 학생들과 싸움이 붙어 또다시 무기정학을 당했다.

 

경남중학교로 전학하여 1948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다. 김영삼은 철학보다는 정치에 관심이 많아 이승만, 김구 등의 강연회를 찾아다녔다. 김영삼은 정식 입학생이 아니라 청강생이었다는 루머가 돌았는데, 서울대 측에서는 정식으로 김영삼의 입학과 졸업을 인정했다.

 

1950년 6.25 이후 피난을 가지 못하고 있다가 1.4후퇴 무렵 서둘러 남하하였고, 1951년 2월 학도의용군에 입대했다. 김영삼은 국방부 정훈국 대북방송 담당원으로 배치되었다. 매일 저녁 5~6시까지 1시간동안 중앙방송을 통해 생방송으로 진행했다. 그때 국회 부의장 장택상으로부터 국회에서 일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장택상의 비서관이 되었다. 1951년 장택상이 국무총리에 취임하자 김영삼은 국무총리실 인사담당 비서관이 되었다. 그해 손상호의 딸 손명순과 결혼을 하였고 이후 2남 3녀를 낳았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자유동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만25세에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1954년 자유당이 이승만의 3선을 확정하기 위해 움직일때 경무대를 방문했다. 김영삼은 3선개헌에 반대하였지만 그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80세였고 김영삼은 28세였는데, 이승만은 김영삼의 발언을 듣고 불쾌하여 손을 떨었다고도 한다. 사사오입 원칙으로 3선 개헌안이 통과되자 김영삼은 자유당을 탈당했다.

 

자유당을 탈당한 후, 1955년 민주당 창당발기준비위원회 33인중 한사람으로 참여하였고 민주당이 결성되자 입당했다.  김영삼은 민주당 신파 장면을 찾아갔으나 장면이 권모술수 쓰는것에 반대하자 김영삼은 민주당 구파 조병옥, 유진산을 찾아갔다. 이후 민주당 구파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 서구에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낙선 후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개표 조작이 의심된다 하여 법원에 제소했으나 무효였다. 1959년 조병옥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기 위해 추대 운동을 벌였다. 4.19 혁명 이후에 치러진 제5대 총선에 당선되었다. 1960년 9월에 총을 든 무장 간첩이 거제도 집에 들어와 어머니 박부련이 살해당하는 일이 있었다.

 

1960년 민주당 구파 윤보선이 대통령에 선출되어 여당생활을 하였는데 윤보선이 민주당을 탈당할때 같이 탈당하여 윤보선이 창당한 신민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김영삼은 윤보선 대통령과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1961년 5.16군사정변 소식을 거제에서 접하였는데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왔다. 쿠데타세력이 민주공화당을 창당할 무렵, 김병로, 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민정당, 박순천과 장면의 민주당, 김준연의 자민당이 있었는데 김영삼은 민정당을 선택하였다. 그는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해줄것을 부탁받았으나 군의 정치참여는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여 참여하지 않았다. 1963년 3월 박정희가 군정연장을 발표하자, 윤보선, 허정 등과 군정연장 반대 데모에 참여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1967년 신민당이 창당되자 입당하였다. 1968년 박정희의 3선 개헌을 강도높게 비판하자 공화당과 우익 인사들은 그를 좌파라며 공격했고, 김영삼 측에서는 어머니가 부장공비에게 살해된 것을 들며 맞대응했다. 그해 정치학도 서석재를 발탁하여 비서관으로 채용하였는데, 이후 1994년 서석재는 군사 정권세력에 맞서 전직 대통령 비자금 사건을 폭로하여 군사정권 세력을 축출하는데 기여한다. 1969년 박정희 장기집권을 비판하던 중 자택 인근에서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하였는데, 김영삼 차 창문에 초산을 뿌렸다. 김여삼은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정권 차원의 테러'라고 주장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선언하였으나 결선 투표에서 김대중에 패하였다. 당시 신민당 대선 예비후보로 유진산의 선출이 유력시되었는데, 국민들이 유진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 유진산은 대통령 후보 경선을 포기하였다. 유진산은 김영삼을 후보자로 추대하였고 김영삼은 연설문 초안을 작성하고 리허설까지 했으나 김대중은 신민당 대의원들의 숙소를 돌며 유세를 벌였다.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이 승리하였고, 김대중 지지 유세를 다녔다. 이후 김대중이 당권 장악 의사를 보이자, 이를 반대했다.

 

1973년 일본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이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5일만에 서울의 자택 앞에서 발견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대해 김영삼은 정권 테러 행위를 강력하게 항의했다. 1974년 김영삼은 신민당 총재에 취임하였고 유신 체제에 대한 강력한 반대와 비판을 하였다.

 

1979년 6월 외신기자클럽에서 '야당 총재로 통일을 위해서는 장소와 시기를 가리지 않고 책임있는 사람을 만날 용의가 있다'고 발표하였고 '책임있는 사람에 김일성도 포함되는가'하고 묻자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에 북한이 환영 담화를 발표하고 신민당과 노동당 대표자 간의 예비접촉을 제의하는 등 반응을 보이자 여당은 '반국가적 행위'라고 문제 삼았다. 김영삼의 발언과 관련해 상이군경과 반공청년 120여 명의 반공우익이 신민당 중앙당 당사에 난입하여 당원들에게 구타와 폭행을 가하며 기물을 파귀하고 당기를 찢어버렸다. 일부는 상도동 김영삼 자택으로 몰려가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1979년 8월 YH무역의 여성 노동자 172명이 신민당 당사에 찾아와 농성을 벌였다. 김영삼은 이들을 위로하며 지켜주겠다 약속했고 노동자 시위를 주관하던 노동운동가들이 모두 신민당사와 신민당 지구당으로 숨어들었다. 김영삼은 원내 철야농성을 지휘하며 당사 주변을 순찰하여 경찰청 정보과, 보안과에서 나온 형사들을 발견하면 폭력을 행사하며 경고했다. 경찰의 경고에도 김영삼은 무시하였고 마포경찰서장의 뺨을 치며 대응했다. 2000여명의 경찰이 신민당사에 투입되고 신민당 의원, 당직자와 몸싸움을 벌이다 진압되었고 노동자들은 모두 강제연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건물옥상에 올라간 YH무역 노동자 중 여공 김경숙이 신민당사 4층에서 추락하여 사망했고, 김영삼은 상도동 집으로 강제연행되었다.

 

 

1978년부터 김대중을 가택연금했던 박정희 정권은 1979년 9월 법원에서 김영삼의 신민당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을 내렸다. 10월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주도로 김영삼의 국회의원직 제명을 요구했고 국회에서 여당 단독으로 의원 박탈을 의결했다. 이후 김영삼은 가택 연금되었다. 10월 15일 부산대 학생들에 의해 민주선언문이 배포되고 다른 대학 학생들과 시민들이 가담하여 대규모 독재타도, 반정부시위가 시작되었다. 마산과 창원으로 시위가 확산되었고 이 사건이 부마 항쟁이다. 김영삼의 제명이 부마 항쟁을 촉발했고 유신 정권 종식의 계기가 되었다. 10월 26일 박정희가 피살당했다. 가택연금이 풀린 김대중 등 재야인사들이 신민당에 입당할 의사를 밝혔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12.12 사태가 발생하자 강원용과 윤보선은 김대중과 화합하고 단일화할 것을 권하였으나 둘은 이견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각자 대권 행보에 나섰는데, 김영삼은 김대중이 신민당에 입당해야한다고 주장했으나 김대중은 이를 거부했다. 윤보선과 두 사람은 3자 회동을 했지만 뜻은 하나로 되지 못하였고 새로운 군부 세력 집권이 예상되자 윤보선은 정계 은퇴를 하였고 김영삼은 민주당 구파의 리더가 되었다.

 

1980년 5.17 쿠데타가 발생하였고 김영삼은 이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가 가택연금 상태가 되었다. 전두환의 제5공화국 정권에 항의하며 장기간 단식 투쟁을 단행하여 주목을 받았다. 그해 10월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의 강요로 정계 은퇴 선언을 발표하였고 연금에서 해제된 김영삼은 재야인사들과 함께 등산모임을 조직하고 민주산악회를 출범시켰다. 이후 민주산악회는 주요 정치적 사건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며 정치적 활동을 하였다. 김대중 계열 정치인들도 이에 가담하여 적극 협력하여다.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시키고 이민우, 김대중 등과 신한민주당을 창당했다.

 

 

 

1985년 충선에서 신한민주당이 제1야당으로 올라서자 대통령 직선제 개을 요구하였다. 1987년 전두환 대통령이 호헌을 선언하자 이를 반대하였고 대학생들의 호헌철폐 시위가 있자 학생들의 집회에 동조했다.(6월항쟁) 신민당에서는 내각제 개헌안을 추진할 생각을 보였는데 김영삼은 내각제 개헌을 하면 탈당하겠다고 선언했다. 1987년 김대중과 함께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또다시 대통령 단일화 문제를 협의하였으나 김영삼은 조기 후보 단일화를 주장하였고 김대중은 개헌 협상 후 조정을 주장하여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여러번의 회담으로도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자 재야인사들은 '적전분열'이라며 강도높에 질타했다. 김영삼은 통일민주당을 자악하여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하고 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했다. 김대중은 평화민주당을 창당한 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고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노태우 36.6%, 김영삼 28%, 김대중 27% 의 득표율이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에 패하였고, 김영삼은 그해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노무현을 정치계에 발탁하였다. 김영삼은 노무현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였는데, 1990년 3당 합당과정에서 노무현이 반대하면서 둘은 결별하였다. 1990년 여소야대로 위기감을 느끼던 노태우는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합당을 하게 된다. 3당은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하였고 김영삼이 대표로 취임했다.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3인은 3당합당을 하며 "내각제 합의문"을 작성하였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았다.

"1. 의회와 내각이 함께 국민에게 책임지는 의회민주주의 구현, 2. 1년 이내에 의원 내각제로 개헌, 3. 금년 중에 개헌작업 착수"

김영삼은 내각제에 반대하였지만 당론으로 인해 어쩔수 없이 서명을 했다.

이에 1990년 10월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가 '내각제 페기, 지방자치제 실시' 등을 내걸고 단식 투쟁을 하자, 그를 찾아가 내각제를 폐기하고 지방자치제를 실시하도록 힘쓸 것을 약속했다. 민정당에서는 내각제 합의는 사실이라고 하였으나 당대표인 김영삼은 내각제의 포기와 당 대표의 실질적 권한보장이라는 조건으로 노태우 대통령에게 단독면담을 요구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반응이 없고 그의 의도대로 되지 않자 마산으로 낙향해 버렸고, 김종필은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여권 내의 분열이 발생하자 노태우 대통령은 김영삼이 요구를 들어주었다. 김영삼은 내각제 합의를 자신에게 대권을 주지 않으려는 정치공작이라고 판단했기에 결사적으로 내각제를 반대했다.

 

가네코 가오리와 이경선

1992년 김영삼은 박철언, 박태준, 이종찬을 물리치고 민정계와 공화계 의원들의 반발을 누르고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에 선출되었다. 당시 김영삼의 숨겨둔 딸이 뉴욕에 거주하고 있다는 기사가 돌기도 했다. (임기를 마치고 2년 후 2000년에 딸 가네코 가오리 라고 밝힌 여성이 김영삼 대통령을 상대로 친자소송을 냈다. 그녀의 생모 이경선씨는 미국 LA에서 인터뷰를 통해 1960년대에 김영삼을 만났고 일본인에게 양녀로 입양시킨 사연을 공개했다. 이경선씨는 김영삼 재임 중 김기섭 안기부 기조실장으로부터 23억 원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김대중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반공주의 세력과 군사정권 세력은 야당 출신 인사들이 북한과 거래한다는 의혹을 제시하기도 했다. 14대 대선은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의 3파정이었다. 김영삼은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발언을 해 문제가 됐으며, 정주영은 불법 도청으로 인한 공격을 받았다. 김영삼은 유세과정에서 "우리가 남이가" 라는 말을 유행시켰고, 12월 14대 대선에서 김대중을 193만표차로 꺾고 대통령이 되었다.

 

김영삼 후보

 

 

제14대 대통령 김영삼(1993~1998)

 

김영삼은 대통령 취임 후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을 공개했고 총액수는 17억 7,822만 원이었다. "역사를 바꾸는 명예혁명"이라며 공직자들의 재산공개를 종용하여 삼부요인과 고위 공무원들이 연이어 재산을 공개했다.

5월 특별담화에서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하여 5.18 민주화 운동을 격상시켰다.

 

김영삼은 국공유화에서 민영화로 사회자본구조를 개선해 나갔다. 도로, 철도의 민영화와 전매청을 민영화하였다. 8월부터 금융실명제를 발표해 차명, 비실명 계좌의 이용을 불가능하게 했다. 5.17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들을 대기업으로부터 불법, 부당하게 정치자금을 모금했다고 하여 비자금의 실체를 파헤치고 국고에 환수하였다.

 

 

 

김영삼은 5.16 군사정변을 쿠데타로 정의하여 각 교과서에 군사혁명으로 실린 부분을 쿠데타나 정변으로 고치도록 하였다. 이로인해 김종필 등 보수세력의 지지를 잃었고, 김종필 등은 자민련을 창당하였다. 김영삼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임시정부에서 찾으려 하여 중화인민공화국에 있는 임정 요인들의 유해를 환국시키는 사업을 추진했다.

 

김일성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요구하여 호응을 이끌었으나 1994년 7월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무산되었다. 이후 남북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는데 전남대학교에서 김일성 분향소를 만들어 250여명의 학생들이 참배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

 

김영삼은 1995년부터 특별시, 광역시, 직할시장, 도지사 및 군수 등을 주민이 직접 선출하도록 제도를 개정했다. 자치단체장 선거는 1960년 장면 총리의 명으로 실시되었다가 5.16 으로 폐지된 후 34년만에 실시되었다.

 

총독부 청사를 해체한 후 경복궁을 복원하고 새로운 국립중앙박물관을 건립을 지시했다. 당시 총독부 청사 철거 문제로 철거와 보존이라는 논쟁이 대립하기도 하였다. 우익단체들이 공개집회를 통해 총독부 철거를 반대했지만 김영삼은 총독부 철거를 강행했다. 1995년 8.15 광복 50주년 경축식에서 총독부 청사 중앙돔 랜턴의 해체를 시작으로 철거에 들어갔다.

 

대선당시 여야 정치인들이 노태우의 비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김대중은 노태우에게서 20억원을 받았다고 자수하여 질타를 받았다. 김영삼은 돈 받은 일이 없다고 잡아뗐는데 노태우도 아무말을 하지 않고 감옥에 들어갔다. 노태우는 훗날 2011년 회고록에서 대선 당시 김영삼에게 3천 억원의 대선자금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김영삼은 역사바로세우기와 과거사 청산을 발표했다. 신군부와 하나회를 숙청하고, 제5공화국의 전진 대통령들을 구속, 수감시켰다. 정치군인들을 예편, 숙청해서 한국 군의 정치적 중립을 확립했고 군내 각종 사조직을 적발해 해산시켰다. '하나회'와 관련된 정치군인들을 모두 전역시키고,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육.해.공군 등 3군 수뇌부를 전부 직업군인으로 교체했다.

 

김영삼은 1994년 전직 대통령 비자금에 대한 공개 수사를 지시하였고 1995년에는 12.12 사태와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 광주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재판까지 하도록 지시했다. 1995년 12월 노태우와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민주자유당을 해산하고 신한국당을 창당했다. 1996년 1월 노태우와 전두환을 구속 기소하였고, 광주사태를 '광주항쟁', '광주민중항쟁'으로 수정하도록 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1996년 8월 각각 사형과 징역22년을 선고받았고, 12월 항소심에서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으로 감형되었다.

 

 

1997년 1월 김영삼은 노동법 개정이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는 기자회견을 하여 노동계와 국민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전국에서 노동법 개정반대 총파업이 벌어졌고 한보철강이 부도로 도산했다. 한보회장 정태수가 구속되었고 수사 도중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이 한보비리에 연루됨이 밝혀졌다. 김현철은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체포되었고 김영삼은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후 기아자동차 부도 사태가 발생하고 외환금융이 악화되어 IMF 구제 금융사건으로 인해 국제 통화 기금의 원조를 받게 되었다.

 

199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정치 공작을 벌였는데, 1998년 3월 조사결과에 따르면 국가안전기획부 부장 권영해가 주도한것으로 밝혀졌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후보가 모두 전두환과 노태우의 사면 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대선에서 이회창은 김대중에게 39만 표 차로 떨어졌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날 1997년 12월 20일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당선자의 협의로 사면 복권되었다.

 

퇴임 후 민주자유당과 신한국당의 지도자 및 민주당계 정당의 지도자로 영향력을 미쳤다. 또한 퇴임 후 1년 6개월동안 김대중 정부에게 내사를 당했다고 말했다. 1999년 김포공항에서 70대 남자로부터 얼굴에 페인트 달걀을 맞는 사건이 있었다. 2002년부터 일본 와세대 대학에 특명 교수로 출강하였다.

 

김영삼은 노무현을 정계에 입문시켰는데,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될 때, 자신이 여러차례 충고를 했는데 이를 소홀히 했다며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 또한 2006년 기자회견에서 노무현에 대해 '외교를 못한다' '대통령이 문제다. 일본이 바보로 본다' 등의 독설을 하였다. 또한 김대중의 방북 계획에 관련해 '말만 나오는 것이지 가기는 자기가 어디로 가느냐. 누가 오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김정일에게 아무것도 갖다줄게 없는데 누가 오라고 하겠냐'는 독설을 했다.

 

2009년 노무현이 투신자살을 하자 '노무현국민장 장의위원회'고문으로 위촉되었다. 이후 인터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에 대해 '국민장이 아니라 가족장으로도 충분했다'라는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되었다. 2010년 1월 상도동 자택과 거제도 땅을 포함해 50억원에 이르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뜻을 밝혔고, 2월에는 친자 확인 소송에서 패소되어 아들이 생겼다. 2013년 반신불수를 동반한 중증 뇌졸중과 폐렴으로 입원하였으며 2015년 11월 22일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는 5일간 국가장으로 치뤄졌다.

 

 

김영삼은 부인 손명순과의 사이에서 2남3녀를 두었다. 또한 혼외 딸 1명, 혼외 아들 1명을 두었다.

 

김영삼 가계도

 

혼외자인 김모(57)씨는 김영삼 사후에 유산을 나눠달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3억 4천만원 상당의 유류분 반환 청구 소송을 냈다. 김영은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는데 김씨는 이미 친자로 등록된 상황에서 재산 증여의사를 표시한 것이라며 소송을 한 것이었다.

 

차남 김현철은 미국에서 유학 후 쌍용투자증권(신한금융투자)에 취직하여 근무하다가 김영삼의 대선을 돕기 위해 1987년에 퇴사하고 정계로 입문하였다. 김영삼 대통령 재임중 1997년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되었다. 징역 2년, 벌금 10억 5천만원, 추징금 5억 2420만원을 선고받았으나 그해 8월 사면되었다. 2004년 불법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체포되었고 검찰 수사 중 자해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2008년 정계에 복귀했고 2012년 총선 출마를 결심했으나 공천에 탈락했다. 2012년 18대 대선에서 박정희-박근혜를 비판하며 문재인 지지 선언을 하였고 2017년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했다. 이후 2019년 더불어민주당에 탈당하고 문재인 정부의 대북.일자리.탈원전 정책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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