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세계사

스코틀랜드 스튜어트 왕조

GoodFortune 2023. 6. 2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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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2세

1316~1390

재위 1371~1390

 

스코틀랜드 스튜어트 왕조의 초대 국왕이다. 스코틀랜드 브루스 왕조의 로버트 1세의 외손자이자 데이비드 2세의 외조카이다. 데이비드 2세가 후사없이 사망하게 되며 외조카인 로버트 2세가 왕위를 이었다. 왕위를 이을 당시 55세로 외삼촌 데이비드 2세보다 나이가 많았다.

스코틀랜드 부르스 왕조 로버트 1세의 후손이 스코틀랜드 스튜어트 왕조를 열었고, 훗날 잉글랜드 스튜어트 왕조 또한 로버트 1세의 후손 제임스 6세(잉글랜드 제임스 1세)가 열게 되는 것이다.

로버트 2세는 잉글랜드와 국경 분쟁이 있었으며 프랑스와 공동으로 잉글랜드를 위협했다. 잉글랜드가 강세가 되며 프랑스가 개입을 하지 않자 로버트 2세는 협상으로 휴전을 하게 되었다. 이후 건강 악화로 자식들의 쿠데타로 밀려나있다가 사망했다.

 

로버트 3세

1337(1340)~1406

재위 1390~1406

로버트 2세의 장남으로 즉위 당시 나이가 많았다. 동생 파이프 백작(훗날 올버니 공작)이 실권을 잡고 로버트 3세의 아들 데이비드와 권력 다툼이 심했으나 로버트 3세는 중재를 하지 못하였고 올버니 공작은 데이비드 감금하고 실권을 잡았다.

 

제임스 1세

1394~1437 재위 1406~1437

 

잉글랜드 제임스 1세와 왕호가 같아 혼동하기 쉽다. 스코틀랜드 제임스 1세의 후손이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이며 그가 잉글랜드 제임스 1세이다.

제임스 1세는 로버트 3세의 차남(혹은 3남)으로 형 데이비드가 숙부 올버니 공작과의 권력다툼으로 감옥에서 죽은 후 왕위계승자가 되었다. 올버니 공작을 피해 스코틀랜드를 탈출하다 해적들에게 납치되 잉글랜드 헨리 4세에게 보내졌으며 잉글랜드에서 18년간 지냈다. 잉글랜드 왕실 교육을 받으며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 군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올버니 공작을 물리치고 왕위에 올랐으며 잉글랜드 헨리 4세의 이복조카 조앤 보퍼트와 결혼하였다. 

이후 귀족들에 의해 암살되어 사망했다.

 

제임스 2세

1430~1460 재위 1437~1460

 

제임스 1세가 암살당하며 6살의 어린 나이에 국왕 자리에 올랐다. 성년이 될 때까지 귀족들이 섭정을 했으며 성년이 된 제임스 2세는 가장 먼저 귀족들을 제압하였다. 1459년 백년전쟁에서 프랑스에게 패한 잉글랜드가 혼란한 틈을 타 제임스 2세는 잉글랜드를 침략했고 국경지방에서 전투 중 사망했다.

 

 

제임스 3세

1451~1488 재위 1460~1488

 

제임스 2세가 사고로 사망하게 되며 8살의 어린 나이 국왕 자리에 올랐다. 어머니인 메리가 섭정이 되었다가 어머니 사망 후 케네디가 섭정을 맡았으나 얼마 못가 사망했다. 스코틀랜드 귀족 보이드 경이 섭정이 되었으나 권한을 남용하였고 제임스 3세는 성년이 되자마자 보이드 경과 일가를 모두 쫓아냈다.

제임스 3세는 귀족들을 몰아내고 음악가들을 대신으로 삼았는데 이에 귀족들은 불만이 커져갔고 두번의 귀족들의 반란으로 제임스 3세는 포로로 잡혀 죽임을 당했다.

 

 

제임스 4세

1473~1513 재위 1488~1513

 

스튜어트 왕조의 국왕 중 가장 유능했다고 평가받는다.

15세에 왕위에 오른 제임스 4세는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으며 왕권을 강화시켰다. 

왕비인 마거릿 튜더는 헨리 7세의 2남 2녀중 장녀로 헨리 8세의 누나가 된다. 1502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평화 조약에 체결되며 제임스 4세는 마거릿과 결혼하게 되었다. 당시 제임스 4세보다 마거릿은 16살이나 많았다. 4남 2녀를 두었지만 성인까지 자란 아이는 제임스 5세 뿐이었다. 1509년 잉글랜드 헨리 8세(제임스 4세의 처남)가 왕위에 오르며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사이는 다시 악화되었다.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침략하자 스코틀랜드는 프랑스를 도와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제임스 4세는 잉글랜드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제임스 5세

1512~1542 재위 1513~1542

 

제임스 4세가 전사하며 제임스 5세는 17개월밖에 안된 아이였다. 잉글랜드 헨리 7세의 외손자이지만 아버지의 원수가 되는 외숙부 헨리 8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왕비 마거릿이 섭정을 하였으나, 마거릿은 스코틀랜드 귀족가문 더글라스의 앵거스 백작 아치발드 더글라스와 재혼하게 되며 섭정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마거릿과 더글라스는 잉글랜드로 가 딸 마거릿 더글라스를 낳았으며 마거릿 더글라스는 훗 제임스 6세의 친할머니가 된다. (이후 마거릿은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이혼을 하고 세번쨰 결혼을 하였으나 또다시 이혼했다.)

마거릿이 물러난 후 1526년 앵거스는 제임스 5세를 프랑스에 연금시켰는데 2년 후 제임스 5세는 앵거스를 프랑스로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다. 1538년 프랑스 귀족 마리 드 기즈와 결혼하며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와 대립관계가 되었다. 딸 메리 스튜어트를 낳았으나 잉글랜드와 전쟁을 치루고 건강이 악화된 제임스 5세는 메리 생후 1주일에 사망했다.

 

메리 1세

1542~1587 재위 1543~1567

 

제임스 5세와 프랑스 귀족 출신 기즈 드 마리의 딸인 메리 1세는 잉글랜드 헨리 7세의 증손녀이기도 하다.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놓고 경쟁하며 엘리자베스 1세와 라이벌이라는 평가도 있다.  헨리 8세의 딸 엘리자베스 1세와는 5촌 조카가 된다.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 앤 불린이 간통죄로 사형을 당하며 헨리 8세의 사생아로 여겨졌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 신봉자들은 헨리 7세의 증손녀인 메리 스튜어트가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개신교를 옹호했던 탓..)

아버지 제임스 5세의 사망으로 생후 일주일만에 왕위에 올랐고 어머니 마리가 섭정을 했다. 잉글랜드 헨리 8세의 강요로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 6세와 약혼했으나 헨리 8세의 스코틀랜드를 합병하려는 야심으로 동맹이 깨지며 사이가 약혼이 깨졌다. 마리 드 기즈는 프랑스 앙리 2세의 아들 프랑수아 2세와 약혼을 시켰고 메리는 프랑스로 가서 길러졌으며 마리가 스코틀랜드를 통치했다. 1558년 프랑수아 2세가 프랑스의 왕위에 오르며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지만 즉위 1년반만에 사망하며 메리는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어머니 마리 또한 같은 해 사망하였고 메리는 여왕으로서 스코틀랜드를 다스렸다.

이후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와 두번째 혼인을 하였다. 헨리 스튜어트는 헨리 7세의 후손으로 메리 1세의 할머니가 헨리 스튜어트의 외조모가 된다.(유럽 역사에서는 흔한 일.......)

단리 경과의 사이에서 아들 제임스 6세를 낳았으나 단리 경이 왕의 칭호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로 둘 사이는 멀어졌고 단리는 살해당했다. 살해 사건의 배후는 보스웰 백작으로 추정되는데 보스웰 백작은 메리와 강요결혼을 하게 된다. 이 일로 보스웰과 메리 1세가 모의하여 단리 경을 죽였다는 유언비어가 있기도 했다.

1567년 귀족들의 반란으로 메리는 감금당하고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살 된 제임스가 스코틀랜드 왕위에 올랐으며 메리는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1세에게 도움을 청하여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잉글랜드로 망명한 메리 1세는 카라일 성에 감금되어 5촌 고모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썼으나 답장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스페인 펠리페 2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메리 스튜어트와 결혼해 메리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올리려고 하는 계획을 눈치 챈 엘리자베스 1세는 반역죄로 메리 1세를 재판에 넘겼고 1587년 메리는 사형당했다. 이 일로 스페인과 잉글랜드의 갈등은 더욱 심해지게 된다.

 

제임스 6세 (잉글랜드 제임스 1세)

1566~1625

스코틀랜드 국왕 재위 1567~1625

잉글랜드 국왕 재위 1603~1625

 

제임스 5세의 딸 메리 1세가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와 두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들이 제임스 6세이다. 메리 1세가 폐위된 후 태어난지 얼마 안되었을 때 스코틀랜드 왕위에 올랐다.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보다는 잉글랜드 제임스 1세로 더 알려졌다.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며 헨리 7세의 4대손이 되는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 왕위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제임스 6세는 어머니 메리 1세도 헨리 7세의 외증손녀이며 아버지 단리 경 또한 헨리 7세의 외증손자가 된다.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 치하에 현재 영국 국기가 탄생하였고 1607년 북아메리카 신대륙을 제임스타운이라 부른것도 제임스 1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청교도에게 영국 성공회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여 1620년 청교도들은 메리 플라워호를 타고 북아메리카 신대륙으로 떠나 그 곳을 퓨리턴이라 불렀고 아메리카에 정착해서 살게되며 미국의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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