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그리고 맛집/서울나들이

서울나들이 / 덕수궁 / 경운궁 / 역사이야기

GoodFortune 2018. 10. 3. 19:44
반응형

 

 

덕수궁(경운궁)

 

덕수궁은 많은 부분이 사라지고 훼손되었지만

많은 역사를 지니고 있는 조선시대 궁궐입니다.

 

일제에 의해 덕수궁터는 분할 매각 되어

외국 공사관들이 많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지도에서 확인해보니 영국대사관 러시아대사관

뉴질랜드 대사관 구미국공사관이 보이더라구요.

 

1910년 당시 덕수궁 평면도를 보면

덕수궁이 상당히 큰 규모인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덕수궁은 원래 크기의

1/3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선원전터에 있던 고종의 계비 엄비의 혼전을 헐어내고

경성제일여자고등학교를 짓고,

길 건너에는 덕수초등학교, 경성방송국을

짓기도 하였습니다.

 

선원전터는 내년부터 복원작업을

진행할 것이라고 하더라구요.

 

 

덕수궁의 입장시간은

09:00 부터 20:00 까지이고

관람은 21시까지 가능합니다.

예약없이 야간관람이 가능한 곳입니다.

 

매주 월요일은 휴궁입니다.

 

입장료는 성인 1000원입니다.

 

안내해설이 아래와 같이 진행되는데요.

 꼭 한번 들어보세요.

재미있게 설명해주셔서

기억에 잘 남더라구요.

 

 

 

 

 

 

아래 지도는 구한말

덕수궁(경운궁) 배치도인데요.

1번부터 20번까지의 전각들이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고 하니

상당 부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이었습니다.

 

원래 경운궁 자리는 세조의 손자인

월산대군의 사저가 있었습니다.

 

세조의 큰아들 도원군(덕종으로 추존)이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8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세자빈 한씨(소혜왕후)를 궁에서 내보내며

거처할 곳을 경운궁 자리에 마련해주게 되었습니다.

이후 도원군의 차남인 자을산군(성종)이 왕위를 잇게 되며

인수대비가 된 한씨도 떠나게 되자

그 집은 도원군의 큰아들인 월산대군 소유가 되었다고 합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으로 궁이 쑥대밭이 되자

월산대군의 사저를 행궁으로 삼아 머물게 되어

이곳은 궁궐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조는 16년을 살다가 경운궁에서 승하하고

광해군은 지금의 즉조당에서 왕위 등극을 하였습니다.

 

광해군에 의해 궁의 모습을 많이 갖추게 되었지만, 

인목대비 유폐와 인조반정을 겪으며

규모가 축소되었고

인조가 증위한 이후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이후 200여년 동안 궁궐로 사용되지 않은 경운궁은

영조가 즉조당을 찾는 일이 가끔 있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경운궁은 1895년 을미사변에 이은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에

다시 궁궐로 쓰이게 됩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고

왕실 가족은 경운궁으로 옮겨 살게 되었습니다.

 

경운궁의 전각을 복구, 증축하여

1년 후 고종은 경운궁으로 들어왔지만

1880년에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게

공사관 부지를 떼어주었기 때문에

경운궁은 각국 공사관 사이에 들어선 모양이 되었습니다.

 

1904년 경운궁 함녕전에 화재가 발생하여

중화전, 즉조당 등 중심건물이 소실되었지만

고종은 다른 궁으로 이어하지 않고

경운궁을 급하게 복구하였습니다.

 

 

 

1907년 고종은 일본의 압력에 의해

순종에게 양위하게 되는데

경운궁의 돈덕전에서 증위식을 거행합니다.

이 때 고종의 궁호를 덕을 누리며 오래 살라는 의미로

'덕수'라 정하였는데 고종의 궁호를 따서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1919년 1월 함녕전에 머물던 고종이 승하하면서

덕수궁은 주인 없는 빈 궁궐로 남아있다가

1933년 일제에 의해 공원으로 조성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습니다.

 

 

그럼 지금의 덕수궁은 어떻게

보존되고 있는지 한번 볼까요?

 

 

시청역 2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보이는 덕수궁의 대한문 입니다.

 

마침 행사를 하고 있어서

구경하다 들어갔어요.

 

 

 

 

대한문은 지금 덕수궁의 정문으로 사용되고 있는데요.

원래는 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습니다.

현재는 서울시청사 별관 건물 자리입니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부터

들어올때 역시 인화문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덕수궁의 동문이었던 대안문 앞으로

도로가 건설되면서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해지고

자연스럽게 정문의 구실을 맡게 되었습니다.

 

원래 이름은 대안문이었는데

1904년 경운궁 화재 때 소실된것을

다시 세우면서 대한문으로

대한문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고 합니다.

 

1968년 도시계획으로 태평로 폭을 넓히면서

덕수궁 담장을 16.5m 안쪽으로 물리면서

대한문이 길 건너에 혼자 섬처럼 남아있었는데요.

 

2년 뒤 대한문을 다시 한번 14m 뒤로 물리는

작업을 하면서 지금의 위치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대한문을 지나니

오른쪽에 광명문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광명문은 중화문을 지나 위치하고 있었는데요.

원래의 위치가 함녕전 정문으로 남쪽을 향했던 문이라고 합니다.

1904년 함녕전이 소실되면서

1938년에 분리되어 중화문을 지난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다시 제위치를 찾는 공사가 진행중이었습니다.

 

 

원래 함녕전 정문으로 쓰이던

광명문의 옛 사진입니다.

 

이모습 그대로 위치를 옮긴다니

옛모습을 더 간직할 수 있게 되겠더라구요.

 

중화전을 지나 다른 위치에 있을때

광명문은 자격루, 홍천사 범종, 신기전기 화차를 전시하는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광명문 아래 전시되었던 전시물들도

알맞은 곳을 찾아서 위치하길 바래야 겠어요.

 

 

 

광명문 공사터를 지나 조금더 걸으면

중화문이 나옵니다.

 

중화문은 중화전의 문이며

덕수궁의 중문입니다.

원래 2층으로 지어진 건물이었으나

화재 이후 복구하면서

중화전과 중화문 모두 단층으로 지어졌습니다.

 

 

 

중화전 앞 마당입니다.

 

품계에 맞게 줄을 설 수 있도록

품계석이 있습니다.

 

경복궁의 박석(바닥돌)은 자연돌이라

울퉁불퉁해서 눈이 부시지 않는데

중화전은 복원하면서 칼로 깎아 만들어

평평하고 눈이 부시다고 해요.

 

이날은 햇빛이 강하지 않아 눈부심을 느끼진 못했는데

설명을 들으니

경복궁의 박석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어요.

 

 

동쪽에는 문신들이 서고

서쪽에는 무신들이 섰다고 하는데요.

동쪽이 더 높은 사람이 있는것이라 하네요.

이렇게 동쪽, 서쪽 양쪽을 합쳐

양반이라고 부르는것이라 합니다.

 

중화전 양쪽으로 행각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행각은 경복궁에 가면 볼 수 있는데 법전을 중심으로

마당을 감싸고 있는 형태를 뜻합니다.

 

 

 

아래 사진은 덕수궁의 법전인

중화전입니다.

 

임금이 정사를 보시는 곳입니다.

 

중화전은 고종이 1897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옮긴 뒤부터

재위기간 내내 법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다른 궁에서 조선의 왕은 적색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중화전은 황금색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고종황제의 위엄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중화전 내부에는 왕이 앉는 어좌가 있습니다.

어좌 뒤로 일월오봉도가 있고,

그 앞에도 황제의 색인 황금색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중화전의 천장에는

구름속에 노니는 쌍룡을 조각해 넣었는데

중국의 분위기가 풍긴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궁에는

보통 봉황이 많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중화전 뒤에는 준명당과 즉조당이

나란히 위치해있고 복도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기다란 한채의 건물로 보이기도 하고

쌍둥이 건물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왼쪽의 준명당은 대한제국 마지막 옹주인

덕혜옹주가 어릴때 자라던 곳인데요.

 

유치원처럼 사용했던 건물이라고 합니다.

어린 옹주가 떨어지지 않도록 울타리를 쳤는데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오른쪽의 즉조당은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한 곳이며

고종의 후비인 순헌황귀비가 승하할때까지

사용하던 곳입니다.

 

그리고 중화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법전으로 사용되던 곳이기도 합니다.

 

 

 

준명당과 즉조당

앞에 있는 잔디가 있는 공간은

다른 건물이 있던 곳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궁에는

가운데 잔디가 있는 조경은 하지 않기 때문에

궁에 잔디가 있다면 건물터라고 생각하시면 된다고 해요.

 

 

 

 

그 옆으로 석어당이 자리잡고 있는데요.

 

석어당의 이름 뜻은

옛날 임금이 사시던 곳이라는 뜻으로

선조가 머물던 곳이라고 합니다.

 

임진왜란으로 임시 행궁으로 이곳을 사용했던

선조가 머무르고

승하할 때까지 사용하던 곳입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월산대군 후손의 사저였기에

궁궐의 형식을 따르지 않은 곳입니다.

 

 

화재 후 재건할때 중화전, 중화문은

단층으로 지었음에도

석어당은 중층으로 재건했다고 합니다.

현존하는 유일한 중층 목조건물입니다.

 

옛 모습 그대로 색이 없는 목조건물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 참 인상깊었답니다.

 

석어당은 선조가 머무른 후

광해군도 사용했었는데요.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곳이며

인조반정 성공 후

광해군의 죄를 문책한 곳이기도 합니다.

 

 

 

인조가 떠나고 준명당과 즉조당을 제외한

다른 건물들은 다른 주인들에게 돌려주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두개의 건물이 남아있었던 것 같네요.

 

 

 

고종의 어필로 쓴 석어당 이라고 합니다.

 

 

왼쪽 끝에 2층이 올라가는 계단 보이시죠?

 

올라가볼 수는 없지만

살짝 보이더라구요.

 

 

 

 

석어당에서 동쪽에 위치한 덕홍전입니다.

대부분의 건물들은 앞쪽이 넓고

옆으로 좁은 형태를 띄는데

덕홍전은 특이하게 정사각형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종이 함녕전을 침전으로 사용할때

접견실로 사용한 건물입니다.

 

 

 

덕홍전 내부의 모습입니다.

가운데 있는 것은

대한제국의 꽃인 오얏꽃이라고 합니다.

궁궐에서 많이 보이더라구요.

 이 성씨가 한자로 오얏나무 이 씨를 싸는데요

그래서 오얏꽃이 대한제국의 꽃이라고 하더라구요.

 

천장의 등불을 보니

이 시기에 전기가 들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종의 침전이었던 함녕전입니다.

고종이 승하한 곳이기도 합니다.

1904년 덕수궁 화재가

함녕전의 아궁이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중간에 지도 한번 확인할게요~

1번 대안문에서 7번까지 순서대로 설명드렸습니다.

안내설명 들으면서 다녔는데

딱 이 순서대로 설명해주시더라구요.

 

 

 

 

 

함녕전 뒤쪽의 정관헌입니다.

정관헌은 대한제국 시절

러시아 건축가가 지은서양식 건물로

고종이 휴식을 취하거나

외빈을 초대해 연회를 베풀던 곳입니다.

 

고종은 커피를 즐겼던 왕으로도 유명한데요.

내부가 오픈되어 있어서

테이블에 앉아

고종이 커피를 마셨던 기분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물론 커피는 반입금지겠지만요^^

 

 

정관헌에서 석어당 쪽(서쪽) 으로 가면

아래 사진과 같은 문이 있는데요.

 

유현문은 다른 문과는

다르게 생겨서 인상적었습니다.

 

운치있고 아름답죠?

 

이름이 현명하게 해준다는 뜻이라서

이 문을 지나면

똑똑해진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덕수궁의 가장 서쪽에는

석조전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 있습니다.

 

석조전은 조선 왕주에서 마지막으로

지은 궁궐 건물입니다.

19세기 초 유럽에서 유행했던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1910년에 준공한 석조물입니다.

대한제국 선포와 동시에 설계되었으며

대한제국이 끝나던 해에 완성된

대한제국과 역사를 함께한 곳입니다.

 

 고종은 이 곳에서 대한제국을

이끌어가고자 하였지만

실제로 석조전은 그렇게 사용되지는 못했고

후에 일본에서 유학하던 영친왕이

들어왔을 때 이곳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석조전 옆의 서관(별관)은 1938년에 준공되었으며

초기에는 이왕가미술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이 서관인 국립현대미술관 이구요.

 

 

 

다음 사진은 석조전입니다.

 

 

 

석조전은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미를 되찾고자

2014년 10월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을 하였습니다.

 

석조전은 사전예약을 해야만 1, 2층 전시실에 입장할 수 있습니다.

회당 20명이며

일반해설 45분 심화해설 1시간 15분으로 진행됩니다.

 

시간표는 아래 링크 확인해보세요

 

덕수궁 석조전 안내해설 시간

 

저는 일반해설로 예약을 하고 들어갔었는데요.

 

설명이 매우 알차고 좋았었어요.

 

내용이 길어질것 같아서

석조전 내부는 다음 포스팅에 할게요.

 

 

석조전 포스팅 보러가기

 

그리고,

덕수궁 평성문 맞은편 골목길에 중명전이 있는데요.

모르면 지나치게 되는 곳이라고 합니다.

저도 옆에는 지나쳤는데

골목까지 들어가보진 못했어요.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던

아픔이 있는 곳입니다.

 

아래 위치에 있으니

덕수궁에 가시게 되면

중명전에도 꼭 한번 들러보세요.

 

본래 수옥헌 이라 불렸던 중명전은

러시아 건축가가 설계한 벽돌건물입니다.

 

덕수궁 화재 당시 고종이 피신하여

머물렀던 곳이기도 합니다.

 

 

 

덕수궁은

조선 선조 부터 광해군, 고종,

대한제국, 일제강점기가

모두 담겨있는

곳곳에 역사가 담겨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통 궁궐부터 서양식 건물까지

그리고 대한제국으로 가고자 했던

석조전이 함께 어우러져

멋진 모습으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고종이 힘없이 조선을 내주어야만 했었던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설명을 들어보니

근대화를 위해 참 많은 일을 했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던것 같아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