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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독립운동가 장준하, 장준하 가계도, 장준하 후손

GoodFortune 2019. 9. 2.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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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1918-1975

 

1918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장로교 목사이던 장석인과 김경문의 5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이 요절하여 장남으로 자랐다. 그의 조부 장윤희는 개화 인사로 기독교 사상을 받아들여 개신교 장로가 되었고, 양성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1920년 아버지인 장석인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에 쫓겨 삭주군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장석인은 대관유치원을 세우기도 했는데 사회운동가 리영희가 대관유치원을 다녔다고 한다. 장준하는 삭주 대관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 장석인이 교사로 있는 평양 숭실중학교에 재학했다. 아버지를 따라 신성중학교로 전학하였고, 1937년 신성중 교장 장이욱이 독립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자 장준하는 학생대표로 시위 운동을 하다가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 아버지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신성중 교사를 사퇴하고 전도사가 되었다.

 

 

장준하는 신안소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일본으로 갔다. 1940년 일본에 도착하여 도요 대학 철학과 예과를 다니다 1942년 일본신학교에 입학했다. 1943년 신안소학교 시절 제자였던 김희숙과 결혼했다. 김희숙의 부친은 중국 망명으로 조선총독부의 주목을 받았는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일본에서 귀국하여 혼인하였다 한다.

 

장준하는 자원하여 일군에 입대하였는데 자서전에서 '우리 집안의 불행을 내 한몸으로 대신하고자 지원하였다'고 하였다. 일군 입대를 거부하면자신의 약혼자가 정신대에 끌려가는 등 가족과 주변에 가할 탄압 때문이었다는 것이었다. 1944년 입소하였고 그해 7월 중국 장쑤성 쉬저우에서 탈영했다. 일본군을 탈출한 조선인 청년들 김준엽, 노능서 등을 만나 함께 하였다. 이후 김준엽과는 평생 우정을 나누는 동지가 되었다.

 

노하구에서 장준하 일행은 의열단 김원봉을 만났고, 김원봉은 그들을 광복군으로 받아들이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장준하는 김원봉을 공산주의자라 확신하여 거절하고,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의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에 들어갔다. 이후 1945년 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하였다. 장준하는 임시정부의 내부 파벌 다툼을 비판하며 다시 일본군으로 돌아가 임정을 폭격하겠다고 하기도 했다. 2월 광복군에 편입하여 광복군 장교가 되었고, 4월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하였다. 미군 전략첩보대 대원이 되어 3개월간 국내 진공작전에 가담했다.

 

 

당시 임정 요인인 신익희는 광복군이나 탈출 청년들을 빼가 한국청년당으로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신익희의 노력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임시정부로 갔고, 동지들이 신익희를 따라가자 장준하는 분노했다. 장준하는 동지 20명과 몽둥이를 들고 임시정부로 찾아갔는데 신익희는 피신했다고 한다. 광복 후 11월 귀국하여 김구의 비서로 정치,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장준하는 광복군 장교로 있을 시절 중국 서안에서 박정희를 만났다고 한다. 박정희가 일본식 군대 침을 독립군에게 강요하여 장준하가 야단치자 박정희가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을 일본말로 했다고 한다. 이일을 기억하고 있던 장준하는 훗날 신문에서 박정희 얼굴을 보자 만주에서 본 일본군임을 알아봤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박정희에게 들어갔고 이 일로 박정희가 장준하를 싫어하게 되었다. 이 일은 장준하의 측근의 이야기였는데, 언론인 조갑제가 장준하의 아들 장호권은 이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 하며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김구의 비서로 활동하며 이승만의 측근 윤치영의 비서로 있는 고향 친구 최기일과 함께 이승만과 김구의 협조를 위해 노력했으나 장덕수의 암살 사건으로 실패하였다. 1946년 여름 귀국한 이범석이 도움을 요청하자 장준하는 김구 곁을 떠나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에 참여했으나 곧 이범석의 곁도 떠났다.

 

 

1949년 1월 도서출판 한길사를 설립하였고, 1949년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학했다. 1950년 대한민국 행정부 행정서기관에 임관되었다.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 서무과장,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사상계>를 창간하여 국민 계몽을 위한 칼럼, 강연활동을 열심히하다가 1953년 공무원 생활을 그만 두었다. <사상계> 권두언을 통해 1958년, 1959년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는 칼럽을 발표하였고,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장준하

 

1960년 장면 내각이 출범하자 그의 부탁을 받고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의원에 발탁되었고 1961년 대한민국 국토건설단 기획부장이 되었다. 장준하는 장면 정권의 재무장관이자 사상계 동인이던 김영선의 지원으로 사상계의 부채를 청산하기도 했다. 이후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자 <사상계> 6월호 권두언은 쿠데타 지지 성명을 발표했는데 그 글이 무기명으로 되어 있어 장준하의 글인지 쿠데타 세력의 압박에 의해 대필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7월호에서 조속한 민정 이양을 촉구하는 함석헌의 글이 나갔고, 사상계 로 군인 둘이 나타나 장준하와 편집 책임자 고성훈을 끌고 갔다. 그곳에서 김종필은 7월호 사상계 글을 문제삼았다. 이후 7월 중순 군사정권의 부정축재자 처리위원회에 출두하게 되었고 장면 정권의 김영선으로부터 지원받은 1천만 환이 문제 되었다. 장준하는 진술서를 쓰고 1천만 환을 갚아야 했다.

 

한일회담 반대운동이 일어나자 장준하와 <사상계>는 한일회담 반대시위에 섰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규탄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사상계>를 반품작전이라 하며 두 차례에 걸쳐 세무사찰을 강행했다.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이 일어났는데 집권층과 삼성 이병철 사이에 유착이 있었따는 정보가 있었고, 야당과 대학생들이 전국적으로 규탄대회를 열었다. 장준하는 규탄대회에서 재벌총수와 정부 고위층 사이에 오간 내용을 폭로했다. 장준하는 박정희와 재벌들을 비판하다가 발언이 문제가 되어 구속되었다. 장준하는 박정희를 증인으로 신청했으나 기각되었다. 한달간 수감되었다가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1967년 선거에서 박정희가 청년들을 베트남에 팔아먹을 것을 구상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구속되었다. 그해 야당 통합을 추진하여 신민당에 입당해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선거 유세에서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로 광복군에 총부리를 겨눴다며 비난했다. 1971년 출판사 <사상사>를 설립하여 자서전 <돌베개>를 출판하였다.

 

6대 대선에서 윤보선을 지지하며 월남전 파병을 미국의 '청부 전쟁'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박정희의 친일파 발언이 문제가 되어 선거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3개월간 투옥당했다. 1970년 윤보선 등 민주파 구파들이 대통령 후보자로 김대중이 선출되자 반발하여 신민당을 탈당할 때 함께 하였고, 1971년 윤보선과 함께 국민당 창당을 했다. 윤보선은 그가 김구의 비서였다가 장면에 의해 발탁된 인사였다는 점에서 탐탁지 않게 보았으나 장준하는 열심히 윤보선을 도왔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자 환영하였는데, 박정희가 남북회담 대표직을 제의하였으나 이를 거절했다. 1973년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했다. 긴급조치가 기본권 탄압이라며 비판하고 개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14년을 선고받았다. 심장협심증과 간경화 증세 악화로 형집행정지로 출감하였다.

 

 

1975년 민주통일당을 탈당하였고 임시정부 태극기를 대학 박물관에 기증하고 신변 정리를 서둘렀다. 아내와 천주교식 혼례의식을 치르고, 백범 묘소와 망우리에 있는 부모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고 김대중과 만났다. 장준하의 아들 장호권은 그당시 무엇인가 어마어마한 일이 계획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장준하가 '박정희를 깨는 것은 민중의 힘으로 역부족이니 게릴라전으로라도 박을 제거해야 한다' 라고 했다고 했고, 김재규와도 만났다. 1975년 8월 17일 호림산악회 회원 약 40명과 경기도 포천의 약사계곡 입구에 도착하여 약사봉에 올랐다. 그리고 이날 오후 약사봉에서 약사계곡 방향으로 뻗은 절벽 아래에서 호림산악회 회원들에 의해 사체로 발견되었다. 장준하 사망 이후 김재규는 가족들을 돌봐주었다. 1976년 말, 김재규는 장호권을 남산으로 불러 '부친의 사망사건은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백낙준, 유진오, 김영삼, 김대중, 함석헌, 김준엽 등 각계 지인들과 시민 1500여명이 참례했다.

 

장호준 가계도

 

그는 배우가 김희숙과의 사이에서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장호권은 아버지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움직였다. 1976년 백범사상연구소에 들러 아버지의 죽음을 밝혀달라는 성명서를 작성했다. 이후 27년간 해외도피 생활을 하다가 2003년에 귀국했다. 2005년 인터넷 사상계를 복간하여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2008년 국회의원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3남 장호준은 현재 미국 코네티컷의 한인교회 목사로 있다. 조국의 딸에게 온라인 상으로 편지를 남겨서 화재가 되었다. 자신이 장준하의 아들로 살며 받은 여러가지 혜택들을 받은 일들을 쓰며 조국의 딸을 위로하는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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