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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국민의정부 / 김대중 가계도

GoodFortune 2019. 9. 4.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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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1924 - 2009

 

김대중은 1924년 전라남도 신안 하의도에서 김운식과 장수금 사이의 첫째아들로 태어났다. 김운식에게는 본부인이 있었고 장수금은 첩이었다. 김운식은 본부인 김순례에 아들, 딸을 두었고, 장수금에게도 3남1녀를 두었다. 1960년에 김순례와 이혼하였고, 장수금이 본처가 되었다. 어머니인 장수금은 1911년, 1920년 혼인을 하였으나 두번의 사별을 하였다. 김대중의 호적등본은 7살때 장수금의 두번째 남편 윤창언의 서자 윤대만에서 김운식의 서자 김대중으로 개명 등재되었다고 하여 출생에 대해 의혹이 제기 되었다. 장수금의 첫번째 남편(제갈성조)의 형 제갈성복이 친부라는 설과 두번째 남편 윤창언이 친부라는 설이었다.

 

하의도는 대한제국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 소유였으나 덕혜옹주가 소 다케유키와 혼인하며 하의도 소유권이 일본제국으로 넘어가 섬 전체가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가 되었다. 김대중은 1933년 하의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37년 하의도에서 목포북교공립심상소학교로 전학했다. 1939년 목포상업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당시 학생의 절반가량이 일본임에도 반장을 했었다고 한다. 1938년 도요타 다이쥬로 창씨개명을 했다. 1944년 졸업 후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목포상선회사 경리사원으로 입사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지부에 참여하였다. 또한 해방이 된 해에 목포시당 부위원장의 딸 차용애와 만나 결혼했다. 9월 건국준비위원회는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으로 인해 해체되었고 1946년에 공산주의 정당인 조선신민당에 입당하였으나 소련을 추종하는 세력과 갈등하여 여름에 탈당하였다.

 

1947년 장인의 관고로 한민당 목포지부에 입당하여 시당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동양해운이라는 회사를 차리고 해운업을 시작했다. 1948년 목포일보를 인수하여 1950년까지 사장을 했다. 1951년 목포해운회사 사장에 취임했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4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55년 10월 <사상계>에 한국노동운동의 진로 등 여러편의 노동문제 글을 기고하였다.

 

1955년 박순천, 조재천 등 야당 인사들을 알게 되어 민주당에 입당하였고, 1956년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장면 저격 사건을 목격한 후 장면과 인연을 맺었다. 1957년 장면을 대부로 천주교 영세를 받았다. 1959년 부인 차용애가 사망하였다.

1959년 재보선, 196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낙선하였고, 1961년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지만 5.16 쿠데타가 일어나며 의원 활동은 하지 못했다. 이후 1951년에 부산에서 알게된 이희호와 만나 재혼을 하였고 1963년 민주당 소속으로 목포 제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64년 야당 초선의원인 김대중은 본회 연설에서 필리버스터를 해서 인상을 남겼다. 필리버스터는 무제한 토론이라고도 하며, 의회 운영 절차의 한 형태로 어떤 안건에 대해 장시간 발언하여 토론을 포기하고 진행되는 표결을 지연하거나 완전히 막는 행위를 말한다. 물 한모금 마시지 않은 채 이어진 발은은 6시를 넘겨 5시간 19분이나 이어졌다. 원고 없이 한일 국교 수립과정의 잘못된 점과 야당 의원 김준연의 구속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당시 의사진행 지연 발언은 세계 최장이라는 기록을 인정받고 기네스 증서를 받았다.

 

 

1967년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7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었다. 1970년 신민당 내 대통령 후보자 경선에서 김영삼을 40여표 차이로 꺾고 후보자에 지명되었다.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박정희에게 패하였다. 김대중은 총선을 위한 유세 중 교통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는데 당시의 교통사고에 대해 박정희 정권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선거에 패한후 야당은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였는데 당시 서울에서 7천4백여표가 선거관리위원장 서명 대신 직인을 찍었다는 이유로 무효처리되었다. 또한 영남의 박정희와 호남의 김대중이 대립하는 선거운동을 보이며 지역감정 선동이 심한 선거였는데 이후에 벌어진 지역감정이 현재까지도 많은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얼마 뒤 8대 국회의원에서는 신민당이 개헌 저지선(204석 중 69석이 개헌 저지선, 신민당 89석 확보)보다 많은 의석을 확보하여 박정희의 장기집권이 어렵게 되었다.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 전국구로 당선된 김대중은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차 일본을 자주 왕래하였는데 일본에서 1972년 10월 유신 선포를 듣고 미국 망명을 결심했다. 김대중은 일본 언론을 통해 비상계엄령과 유신 체제를 비판하였고, 미국에서 반유신투쟁, 반정부투쟁을 벌였다. 1973년 7월 김대중은 워싱턴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을 결성하여 초대의장에 추대되었고 일본지부 결성을 위해 일본에 입국했다.  8월 반 박정희 집회 참가를 앞두고 중앙정보부에 의해 일본 도쿄에서 납치된 김대중은 129시간만에 서울 자택 근처에서 풀려났다. 이후 김대중은 가택연금을 당했고 정치활동 금지를 당했다. 이후 1987년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은 인터뷰에서 김대중을 암살하려는 의도는 없었으며 교포사회를 중심으로 해외 망명정부를 세울 것을 우려해 납치를 계획한 것이라고 밝혔다.

 

 

1974년 가택연금 중 반유신 투쟁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했다. 1976년 재야 민주지도자들과 함께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을 주도 하여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1심에서 징역 8년, 항소심으로 지역 5년을 받은 후 투옥되었다. 수감 중 접견 제한에 항의하며 단식투쟁을 하였고,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서울대 병원에서 교도소 때보다 제한이 심하자 항의 단식을 하다가 1978년 12월 27일 2년9개월만에 가석방된 후 가택연금을 당했다. 1979년 반유신 운동에 참여하다 3차례 연행 당하기도 하였다.

 

사형 선고받을 때의 김대중

 

1979년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암살당한 후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어 가택연금에서 해제되었다. 재야인사들과 신민당에 재입당하려 했으나 김영삼 총재가 미루자 재입당을 포기했다. 1980년 12.12 군사 반란으로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고 정치활동 금지를 발표하고, 김대중을 포함한 재야인사 20여명을 연행했다. 김대중은 신군부가 조작한 내란음모사건(학생 및 노조 배후조종 혐의)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김대중의 최후 진술 '이 땅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 정치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달라' 이 알려지면서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대사 등 세계 각국 지도자와 인권단체들이 구명운동을 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서울 주재 로마 교황청 대사관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편지를 발송해 김대중의 선처를 당부하기도 했다. 전두환은 김대중의 형을 감형하는 대신 레이건의 취임식에 초청해달라는 제안을 하였고 김대중은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이후 병 치료를 위해 미국에서 치료를 하는 목적으로 김대중은 2년 7개월 수감생활을 하고 1982년 12월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김대중은 전두환에게 앞으로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탄원서를 썼는데, 그것은 자의가 아니라고 밝혔다.

 

 

1983년 한국 민주화와 인권 상황에 대한 입장 표명을 하는 등 한국의 민주화에 계속적인 관심을 기울이다 1985년 2월 귀국했다. 전두환은 김대중이 귀국하면 남아있는 형을 집행하겠다고 경고하였다. 미국 정부는 전두환에게 김대중의 무사 귀국을 보장하지 않으면 전두환의 방미를 백지화시키겠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전두환 정부는 가택연금 외에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였고, 김대중은 미국 하원 의원들과 함께 입국하였다. 안기부 요원들은 김포공항에서 김대중을 강제 연행하였고 가택연금 시켰다.

 

김대중 가택연금 해제

1987년 7월 대선 출마 의사를 밝혔고, 8월 김영삼과 입당문제를 합의한 후 통일민주당에 입당했다. 김영삼과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를 협의했으나 김영삼은 조기 단일화를 원했고 김대중은 개헌 협상 후 조정을 원하여 둘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재야 인사들의 통합 요청에도 협상이 결렬되자 당시 통일민주당을 장악하고 있던 김영삼이 대선 출마를 발표하고 김대중은 탈당하게 된다. 김대중은 평화민주당을 창당해서 대선 출마했지만 노태우가 당선되었고 2위는 김영삼이었다.

 

1988년 13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1990년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3당을 합당하자 반대하고 규탄하였다. 3당 합당, 내각제합의 폐기, 지방자치제 실시 등을 외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김영삼에게 내각제합의 폐기와 지방자치제 실시에 대한 약속을 받고 단식투쟁을 중단했다. 김대중은 1991년 평화민주당을 신민주연합당으로 재개편하였고, 민주당과 합당하여 통합 민주당이 되었다.

 

199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14대 대통령 선거는 김대중, 김영삼, 정주영 3파전 구도였다. 김대중은 김영삼에게 190만여표 차이로 밀려서 낙선하였다. 이에 김대중은 정계은퇴를 발표했다. 1993년 영국으로 출국하여 캠프리지 대학교 객원교수로 활동하다가 귀국한 후 1994년 아시아.태평양 민주지도자회의를 설립했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장악하며 대승을 거두자 김대중은 정계복귀를 선언했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야권에서는 김대중으로는 정권교체가 불가능하니 후보를 교체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국민회의 지지자들 다수가 받아들이지 않았고, 김대중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신한국당의 이회창이 대선 후보로 경쟁하게 되었는데, 이회창 아들 병역 기피 의혹으로 인해 지지율이 추락하였고, 이인제가 경선불복으로 독자출마를 강행하여 여권이 분열하게 되었다. 이때 김대중의 비자금 사건이 폭로되었는데 '김대중이 처조카 이형택을 통해 670억원을 관리해왔다. 1991년 초 노태우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박철언으로부터 200억을 받은 사실이 추가 폭로되었는데, 김대중은 정치자금 받음을 인정하였지만 모두 당 운영에 사용하였다며 부정축재 의혹을 부인했다. 검찰이 비자금 수사를 시작하겠다고 했지만 다음날 수사를 대선 이후로 미루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기아자동차 부도, 경제상황 악화 등의 상황이었고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도 10%도 안되는 임기말의 상황이라 야당의 비자금 수사에 부담감을 느껴 수사를 중지시켰다는 설이 있었다.

1998년 김대중

 

1997년 11월 국민회의는 내각제 개헌을 약속하며 김종필, 박태준과 후보단일화를 하였다. 이때 노무현이 국민회의에 입당하였다. 신한국당은 한나라당으로 개명하고 3김 청산을 내세우며 민주당 조순과 후보단일화를 하였다. 12월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39만표 차이로 이회창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당시 이인제가 대선에 나와 부산, 경남 지역의 표를 얻으며 김대중의 당선에 공헌을 하였는데 이후 이인제는 김대중의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하여 최고위원직을 맡았다. 이후 2002년 대통령 경선에서 이인제는 자기가 대통령 후보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지만, 노무현에게 패하면서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보수진영의 정당으로 옮겨갔다.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1997-2002)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가 시작되었다. 김대중은 정보통신부를 강화시키고, 여성부를 신설했다. 안기부는 국가정보원으로 개명하였다.

 

김영삼 정부 말년에 발생한 IMF 외환위기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금융, 기업, 노동, 공공 4대분야에 개혁을 단행했고 예상보다 3년을 앞당겨 IMF 차입금을 전액 상환했다. IT 관련 벤처기업을 육성하는 데 힘을 쏟아 1998년 말 2000개 회사에 불과했던 IT 관련 기업을 2001년 6월에 1만개 사를 기록했다.

 

김대중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해 햇볕정책을 펼쳤다. 북조선에 협력과 지원을 하여 평화적인 통일의 방향을 보였다. '선평화 후통일'이라는 원칙으로 화해, 협력을 강조한 포용정책을 보였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은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경유해 방북하여 김정일과 남북 경제협력에 대해 회의를 하였다. 김대중은 1999년 '아시아위크'가 선정한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중 공동 1위에 오르기도 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 개성공단 설립에 합의했다. 김대중은 남북간의 관계를 진전시키고, 독재 정권 시절 한국의 인권에 헌신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햇볕정책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무력도발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자 비판을 받았다.

 

노벨평화상 받는 김대중

남북 정상회담과 개성공단 설립의 성과는 있었지만 현대가 북한에 4억 5천만 달러를 송금한 대북 불법 송금사건이 밝혀져 문제가 되었다. 2003년 특검으로 현대상선, 현대전자, 현대건설 등이 5억 달러의 비밀 자금을 마련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특검 도중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자살하였다. 김대중의 측근인 박지원은 SK 등 대기업 자금 1억원 수수 및 대북 불법 송금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특검은 종결됐다.

 

또한 신군부 정권에서 있었던 안기부 불법도청이 김대중 정권에서도 계속 이루어져 문제가 되었다. 국가정보원은 야권인사 및 반정부인사들의 휴대전화를 상시도청했다. 검찰 수사에서 김대중의 숨겨진 딸이라고 주장하는 인물과 그 어머니도 포함되어 있었다. 검찰수사가 시작되었고 2006년 불법 도청을 지시한 전 국정원장 임동원, 신건에게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김대중의 숨겨진 딸이라고 주장한 김모씨는 2006년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김대중의 사생아라는 주장을 부인하며, 박정희 정권 당시 고위 인사 A씨가 생부일 것이라며 그 사람이 어머니에게 김대중의 딸이라 주장하라고 시켰다고 생각한다는 인터뷰를 했다.

 

또한 아들 김홍업은 3억원의 금품을 수수했다 돌려준 혐의로 2004년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고, 3남 김홍걸은 각종 이권 개입과 3억원을 받은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판결을 받았다. 김홍걸은 최규선 게이트에 연루되었는데 김대중은 이 일로 2002년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이 당선되었고, 김대중은 2003년 동교동 사저 옆에 김대중 도서관을 개관했다. 2004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79년 12.12사태와 80년 5.18로 신군부 반대로 조작된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해 5월 유럽 3개국(프랑스, 노르웨이, 스위스)에서 순방과 함께 OECD와 노벨위원회, WHO에서 연설을 했다.

 

2004년 8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김대중에게 박정희 시절 정치탄압에 대한 사과의 뜻을 전했는데 김대중은 마음 속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 같았다고 하였다. 새천년민주당이 2004년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으로 분열했고 노무현은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새천년민주당은 김대중의 지지를 기대했지만 김대중이 열린우리당을 인정하자, 김대중을 지지하던 세력들은 열린우리당으로 옮겨갔다.

 

2009년 6월 6.15남북공동선언 기념행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과 같은 독재자에 비유하며 이명박 정부를 강력히 비판했다. 2009년 9월 미국의 '뉴스위크'에서 조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변혁을 이끈 11인 지도자로 김대중을 선정했다. 2009년 7월 흡인성 폐렴 증세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였고, 8월 18일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86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김대중의 장례는 국장으로 진행되었다.

 

 

김대중 가계도

 

김대중은 첫번째 부인 차용애(1927-1959)에게서 2남 1녀를 두었고, 두번째 부인 이희호(1922-2019)에게서 1남을 두었다. 차용애는 전라남도 목포에서 큰 인쇄소를 운영하던 재력가 차보륜의 딸로 해방 뒤 한민당의 목포시지구당 위원장을 지냈다. 김대중은 목포상업고등학교 친구인 차원식의 동생인 차용애와 인연이 되어 결혼하게 되었다. 장녀인 김소희는 2살에 사망하였고, 장남 김홍일, 차남 김홍업을 낳았다. 김대중이 정계에 입문한 뒤 연이어 선거에 낙선하여 어려움이 있었지만 차용애는 조용히 내조를 했다. 1959년 32세의 나이로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장남 김홍일(1948-2019)은 제 15, 16, 17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경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공군장교로 복부했다. 독립운동가인 윤경빈의 장녀 윤혜라와 혼인하였다. 1980년(전두환 정부) 보안사에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였는데, 고문 도중 자해를 기도한 것으로 목을 다쳤다. 그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사법시험과 행정고시 응시권이 박탈되었다. 1988년 김대중이 창당한 평화민주당의 외곽조직을 만들며 정계에 발을 들였고, 1996년 제 15대 총선에 당선되었다. 2000년, 2004년 3선에 성공하였으나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안상태 전 나라종금 사장으로부터 1억 5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2006년 유죄판결을 받았고 징역2년, 추징금 1억 5천만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의원직을 상실하였고 파킨슨병을 앓다가 2019년 사망하였다.

 

차남 김홍업(1950-)은 경희대 경영학과를 졸업하였고 육군 장교로 만기 전역했다. 1980년 아버지 김대중과 함께 체포, 고문, 가택연금을 당하였으며 1982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인권문제연구소에서 활동했다. 1988년 귀국하여 광고회사 '밝은세상'을 설립 운영하였다. 2002년 이용호 게이트 조사 중 이권개입으로 조사받았으나 혐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당시 가까운 지인인 김성환에게 거짓 자백을 받아 징역2년 벌금 4억, 추징금 2억6천만원을 선고받았다. 훗날 김성환은 사망 이틀전에 검찰 진술 내용이 강요에 의한 거짓이었음을 밝혔다. 그후 2007년 민주당에 입당하여 재보궐 선거에 민주당으로 출마, 당선되었다.

 

두번째 부인인 이희호(1922-2019)의 아버지는 한국 의사 면호 4호 의사 이용기로 남원도립병원장, 포천도립평원장을 역임했다. 이희호는 이화고등여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서울대학교 교육학을 졸업하였다. 한국전쟁 중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대한여자청년단, 여성문제연구원을 창설해 활동했다. 1.4 후퇴 때 피난민들을 후송하던 중 여성운동가 김정례를 알게 된 김대중은 이후 부산에서 이희호를 만나게 되었다. 서울의 대학생 모임인 '면우회'가 피난지 부산에서 모이면서 김대중도 그 모임에 나가게 되었고 토론을 서로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희호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램버스 대학교 사회학 학사, 스카릭 대학교 사회학 석사를 취득하였다. 미국 유학을 다녀와 YWCA 총무로 일하며 여성계 지도자로 자리잡아갔고, 1962년 김대중과 결혼하였다. 좋은 학벌과 왕성한 사회 활동을 통해 형성된 이희호의 인맥은 김대중의 정치 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김대중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세계 각지의 유력인사들에게 유려하고 편지를 보내 구명 운동을 펼쳤고 김대중의 미국 망명 생활에도 도움을 주었다.

 

3남인 김홍걸(1963-)은 미국 포모나대학 태평양연구소 객원연구원을 역임하였고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객원교수이다. 2002년 최규선 게이트 불법 뇌물 자금 수수로 구속되어 김대중 재임시 홍3게이트(뇌물3형제)라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2005년 광복절 경축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2016년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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